데번
데번(Devon)은 영국 남서부에 위치한 주로, 홍차와 스콘, 클로티드 크림, 과일 잼을 함께 곁들여 먹는 영국의 대표적인 오후 차 문화인 '크림 티(Cream tea)' 또는 '데번셔 티(Devonshire tea)'의 발상지이다[1]. 이 지역은 온화한 기후와 넓은 목초지를 바탕으로 낙농업이 발달하여 고품질의 클로티드 크림을 생산해 왔으며[2], 스콘에 크림과 잼을 바르는 순서를 둘러싸고 이웃한 콘월(Cornwall) 주와 수백 년간 문화적 논쟁을 이어온 것으로 유명하다.
역사적 기원과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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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비스토크 수도원의 기원
크림 티의 기원은 11세기 초 영국의 데번 서부에 위치한 태비스토크 수도원(Tavistock Abbey)으로 거슬러 올라간다[3][4]. 997년 바이킹의 습격을 받아 크게 파괴된 수도원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베네딕토회 수도사들이 복구 작업에 동참한 지역 노동자들에게 감사의 표시로 빵과 '클라우티드 크림(Clowted cream, 클로티드 크림의 옛 이름)', 그리고 과일 보존식품을 제공했다는 전설이 존재한다[5][6]. 2004년 역사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11세기 초 태비스토크 수도원 일대에서 노동자들에게 크림과 잼을 얹은 빵을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이 문헌을 통해 확인되었다[4][7]. 비록 당시는 중국 등지로부터 차가 수입되기 이전이었으므로 오늘날과 같은 홍차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스콘의 전신인 빵에 크림과 잼을 발라 먹는 조합의 시초로 평가받는다[5].
홍차의 도입과 크림 티의 완성
영국에 차 문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은 17세기 찰스 2세와 결혼한 포르투갈의 캐서린 브라간자 왕비가 왕실에 차 마시는 관습을 소개한 이후이다[6][8]. 이후 19세기 초 베드퍼드 공작부인 안나 마리아에 의해 오후 3~5시 사이에 차와 가벼운 음식을 즐기는 애프터눈 티 문화가 상류층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데번 지역의 오래된 빵과 크림 식문화가 애프터눈 티와 결합하면서, 갓 구운 스콘과 클로티드 크림, 딸기잼, 그리고 따뜻한 홍차가 세트를 이루는 현대적 형태의 '크림 티'가 완성되었다[9].
철도 교통의 발달과 대중화
1850년대 영국의 철도망이 비약적으로 확장되면서, 데번과 콘월 등 남서부 지역은 관광지로서 큰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2][10]. 런던을 비롯한 대도시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은 현지의 티룸(Tearoom)과 호텔, 농가 등에서 신선한 클로티드 크림을 곁들인 크림 티를 경험하였고, 귀가 후에도 그 맛을 잊지 못해 이를 찾게 되었다[2][10]. 철도 운송을 통해 신선한 크림을 대도시로 빠르게 수송하는 것이 가능해지면서, 데번의 크림 티 문화는 남서부 지방의 특산품을 넘어 영국 전역으로 빠르게 확산되었다[2].
데번 크림 티의 핵심 구성 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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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번 크림 티가 온전한 형식을 갖추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요소가 필수적으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1][9].
- 홍차 (Tea): 크림 티에 곁들이는 차는 전통적으로 뜨거운 홍차이다[1]. 기름지고 부드러운 클로티드 크림과 달콤한 잼의 맛이 입안에 남기는 묵직함을 씻어내기 위해, 바디감이 강하고 떫은맛이 적당히 있는 아삼, 실론, 혹은 이들을 블렌딩한 잉글리시 브렉퍼스트가 주로 선호된다. 베르가모트 향이 가미된 얼그레이 역시 스콘의 풍미와 잘 어우러져 자주 선택된다[11]. 전통적인 영국의 다도 방식에 따라 우유를 기호에 맞게 첨가하여 밀크티 형태로 마시기도 한다.
- 스콘 (Scone): 스콘은 밀가루, 베이킹파우더, 버터, 우유 등을 섞어 구워낸 빵이다. 크림 티에 사용되는 스콘은 겉은 바삭하고 속은 부드러운 질감을 가져야 하며, 단맛이 강하지 않고 담백해야 잼과 크림의 맛을 방해하지 않는다. 오븐에서 꺼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만졌을 때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상태로 제공되는 것이 원칙이다[1][12].
- 클로티드 크림 (Clotted Cream): 클로티드 크림은 크림 티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2]. 원유를 저온살균하지 않은 상태로 서서히 가열한 뒤, 넓고 얕은 팬에 담아 천천히 식히면 표면에 노란색의 걸쭉한 유지방 막(Clot)이 형성되는데, 이를 조심스럽게 걷어내어 만든다[5][13]. 일반적인 생크림의 유지방 함량이 약 18%에서 35% 사이인 것에 비해, 클로티드 크림은 최소 55% 이상의 높은 유지방 함량을 자랑한다[2]. 질감은 버터보다 부드럽고 생크림보다 꾸덕꾸덕하며, 매우 고소하고 깊은 우유 풍미를 지닌다. 데번 지역에서 생산되는 클로티드 크림은 전통적으로 '데번셔 크림'으로 불린다.
- 과일 잼 (Jam): 스콘의 텁텁함과 크림의 느끼함을 잡아줄 산뜻하고 달콤한 과일 잼이 필수적이다[2]. 전통적으로는 새콤달콤한 딸기잼(Strawberry jam)이 가장 널리 쓰이며, 경우에 따라 라즈베리나 블랙베리 잼이 제공되기도 한다[1][3].
데번 방식과 콘월 방식의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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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남서부의 이웃한 두 주, 데번과 콘월은 크림 티를 먹을 때 스콘 위에 크림과 잼 중 무엇을 먼저 바르는가를 두고 오랜 세월 동안 치열한 문화적 대립을 이어오고 있다. 이는 단순한 취향의 차이를 넘어 각 지역의 역사적 자부심이 걸린 주제이다[4].
| 구분 | 데번 방식 (Devon Method) | 콘월 방식 (Cornish Method) |
|---|---|---|
| 순서 | 스콘 → 클로티드 크림 → 잼 | 스콘 → 잼 → 클로티드 크림 |
| 크림의 역할 | 버터와 같이 빵에 직접 밀착되는 베이스 역할 | 잼 위에 얹어 고유의 풍미와 질감을 강조하는 고명 역할 |
| 과학적 특성 | 따뜻한 스콘(약 50℃)의 열기에 크림이 부드럽게 녹아듦 | 잼이 열 차단막 역할을 하여 크림이 녹지 않고 형태를 유지함 |
| 주요 선호 지역 | 데번 주 및 일부 영연방 국가 | 콘월 주, 런던 등 영국 대다수 지역 |
데번 방식 (Devon Method)
데번 방식은 가로로 반을 가른 따뜻한 스콘 위에 클로티드 크림을 먼저 버터처럼 두껍게 펴 바른 뒤, 그 위에 딸기잼을 한 스푼 얹는 방식이다[14]. 데번 사람들은 유지방 함량이 높은 클로티드 크림이 따뜻한 스콘의 열기(약 50℃)에 의해 자연스럽게 녹아내려 빵속으로 스며들어야 스콘과 크림의 결합력이 극대화되고 풍미가 살아난다고 주장한다[6][12]. 또한 점성이 낮은 잼 위에 무거운 크림을 얹으면 미끄러져 흘러내리기 쉬우므로, 크림을 바닥에 깔고 잼을 위에 올리는 것이 물리적으로도 안정적이라는 실용적인 이유를 든다[12].
콘월 방식 (Cornish Method)
콘월 방식은 반으로 가른 스콘 위에 딸기잼을 먼저 얇게 펴 바른 후, 그 위에 덩어리진 클로티드 크림을 듬뿍 얹어내는 방식이다[14]. 콘월 사람들은 잼이 따뜻한 스콘의 열기를 차단하여, 위에 얹어진 클로티드 크림이 녹아서 기름처럼 흘러내리지 않고 크림 고유의 굳기와 풍부한 질감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고 주장한다[12]. 이 방식은 영국 왕실과 런던을 포함한 다수의 지역에서 정석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14].
과학적 분석
식품 과학자 스튜어트 패리몬드(Stuart Farrimond) 박사의 연구에 따르면, 완벽한 크림 티의 맛을 내기 위해서는 스콘, 크림, 잼의 무게 비율이 4:3:3이 되어야 한다[12]. 그는 따뜻한 스콘의 열기를 활용해 크림을 살짝 녹여 풍미를 돋우는 데번 방식의 경우 스콘의 온도가 약 50℃일 때 가장 이상적이며, 잼이 단열재 역할을 하는 콘월 방식의 경우 스콘의 온도가 70~90℃로 더 높아야 크림이 적절한 질감으로 녹아든다고 분석했다[12].
이 논쟁은 영국의 대중문화 속에서도 빈번히 다루어진다[6].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역시 콘월 방식을 선호하여 항상 잼을 먼저 바르고 크림을 얹어 먹었다는 일화가 전해지며, 2018년 콘월의 한 유적지 티룸에서 데번 방식으로 크림을 먼저 바른 스콘 사진을 홍보용으로 게시했다가 지역 주민들의 거센 항의를 받고 공식 사과문을 발표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11].
사회문화적 위상과 제도적 보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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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프터눈 티와의 구별
크림 티는 핑거 샌드위치, 타르트, 케이크 등 다양한 디저트가 3단 트레이에 화려하게 제공되는 정식 애프터눈 티(Afternoon Tea)에 비해, 가격과 격식 면에서 훨씬 대중적이고 간소화된 형태의 티타임이다[2][14]. 일상적으로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식사 대용 혹은 오후 간식의 성격이 강하며, 영국 전역의 소박한 티하우스나 시골 농가, 관광지 카페 등에서 흔히 판매된다[1][2].
원산지 명칭 보호 논란
유럽연합(EU)은 콘월 지역의 전통적 조리법에 따라 생산된 크림에 대해 '콘월 클로티드 크림(Cornish Clotted Cream)'이라는 명칭으로 원산지 명칭 보호(PDO) 지위를 부여하였다[13]. 이에 따라 해당 명칭은 콘월산 우유를 사용하고 규정된 지방 함량(최소 55%) 등을 준수하여 콘월 주 내에서 생산된 크림에만 독점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13]. 반면 데번 지역 역시 오랜 역사적 전통을 가졌음에도 상대적으로 조직적인 브랜드 보호 조치가 늦어져, 2010년대에 이르러 '데번 크림 티'의 문화유산적 가치와 명칭을 보호하기 위한 지역 사회 차원의 노력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3][4].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Tavistock Abbey Manuscripts, 1015 (discovered in 2004)
- Dr. Stuart Farrimond, 'The Science of the Perfect Cream Tea', 2018.
- European Commission, 'Cornish clotted cream' Protected Designation of Origin (PDO), 19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