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례
차례(茶禮)는 설날, 추석 등 명절이나 절기에 조상에게 올리는 한국의 전통 제례 의식이다[1]. 명칭 그대로 본래는 차(茶)를 올리는 예식에서 유래하였으나[2], 역사적 흐름과 사회적 변화를 거치며 오늘날에는 주로 술을 올리는 약식 제사 형태로 정착하였다[3][4].
어원과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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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의 한자는 '차 다(茶)' 자와 '예도 예(禮)' 자를 쓰며, 이는 '조상에게 차를 올리며 드리는 예절'을 뜻한다[2]. 이 명칭은 중국 송나라 시기의 학자 주자(朱子)가 정립한 가정 제례 규범인 『주자가례(朱子家禮)』에서 비롯된 것으로 분석된다[4][5]. 『주자가례』의 「사당(祠堂)」 편을 보면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사당에 참배하는 참례(參禮)를 올릴 때, 보름날에는 술을 쓰지 않고 차만 올리는 규정이 기록되어 있다[4][6].
한국에서 조상이나 신에게 차를 올린 역사는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2].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에 따르면 신라 문무왕 1년(661년)에 수로왕의 제사를 부활시키면서 제수로 술과 단술 외에 떡, 밥, 과일과 함께 차를 올렸다는 기록이 존재한다[7]. 또한 신라 경덕왕 때 충담사(忠談師)가 매년 삼월 삼짇날과 구월 중양절에 남산 삼화령의 미륵세존에게 차를 끓여 바쳤다는 설화 등도 차를 올리는 제례적 습속이 매우 오래되었음을 보여준다[8][9].
역사적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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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의 구체적인 변천 과정을 시대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고려 시대: 불교가 국교였던 고려 시대에는 왕실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차 문화가 고도로 발달하였다[10][11]. 국가적 대축제인 연등회와 팔관회는 물론이고, 조상을 기리는 제례나 불교식 재(齋)에서도 항상 차가 필수적인 제물로 쓰였다[11][12]. 고려 왕실에서는 진다(進茶)라는 의식을 통해 왕에게 차를 올렸고, 백성들도 일상의 다양한 의례에서 차를 올렸다[11]. 당시 고려 시대에는 찻잎을 쪄서 찧은 뒤 틀에 찍어 건조해 보관하는 단차(團茶) 형태의 긴압차가 주로 쓰였다[12]. 제례를 올릴 때는 이 긴압차를 맷돌에 갈아 고운 가루로 만든 뒤 찻잔에 넣고 끓는 물을 부어 다선으로 휘저어 거품을 내는 방식으로 차를 올렸다[6][12].
- 조선 초기~중기: 조선 왕조가 건국된 이후 유교적 의례인 『주자가례』가 장려되면서 조상을 모시는 사당 제도가 점차 민간으로 확산되었다[2][13]. 그러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사찰이 통제되면서 주요 차 생산지였던 사찰들의 차 제조 맥이 끊기기 시작했다[10][11]. 또한, 차에 부과되는 과도한 공납(세금) 부담으로 인해 농민들이 차나무를 고의로 베어내는 등 차 생산량이 급감하였다. 결정적으로 16세기 중반 이후 소빙기 한파가 닥치면서 한반도 남부 지방의 차나무들이 대거 고사하였다[7].
- 조선 후기~현대: 차를 구하기가 극도로 어려워지자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와 같은 대표적인 유학자들은 차 대신 끓인 물(숙수)이나 숭늉으로 대체하여 제사를 지내도 무방하다는 주장을 내놓았다[6][7]. 이 과정에서 점차 차를 올리는 진다(進茶) 절차가 생략되거나 술(酒)로 완전히 대체되었으며, '차례'라는 명칭만 남은 채 실제로는 술을 올리는 제례로 고착되었다[6]. 일제강점기에는 총독부의 의례 준칙 등에 의해 연간 수십 회에 달하던 차례의 횟수가 설날과 추석 두 번으로 축소되었고, 이는 오늘날 명절 차례의 전형이 되었다[13].

전통 예법에 나타난 차례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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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예법에서 차례는 기제사(忌祭祀)와 격식이 뚜렷하게 구분되는 간단한 약식 의례다[14][15]. 본래 유교의 지침서인 『주자가례』에 명시된 명절 차례는 지극히 소박한 구성을 갖춘다[16][17].
기제사가 고인이 세상을 떠난 날 밤에 지내는 무겁고 엄숙한 추모 의례라면, 차례는 설날이나 추석과 같은 기쁜 명절 아침에 온 가족이 모여 조상에게 새해나 수확의 기쁨을 고하고 안부 인사를 드리는 성격을 띤다[15][18]. 따라서 예서에 따르면 명절 차례상에는 과일 한 쟁반, 술 한 잔, 그리고 차 한 잔만을 소박하게 진설하는 것이 원칙이다[18].
또한 차례에서는 기제사와 달리 술잔을 세 번 올리는 삼헌(三獻)을 하지 않고 단 한 번만 올리는 단헌(單獻)을 행하며, 조상을 기리는 긴 편지글인 축문(祝文)도 읽지 않는다[14][17]. 밥과 국 대신 명절의 절식인 떡국(설)이나 송편(추석)을 올리는 것도 주요한 특징이다[13][15]. 현대에 들어 차례상이 수십 가지의 복잡한 전과 나물, 탕으로 가득 차게 된 것은 전통 예법이라기보다는 해방 이후 서민 경제의 성장과 가문 간의 형식적 경쟁이 낳은 왜곡된 풍습이라는 것이 예학계의 중론이다[19]. 실제로 안동 퇴계 종가 등 영남의 명문가에서는 설 차례상에 떡국, 술, 포, 전 한 접시, 과일 한 쟁반 정도만 올리는 지극히 간소한 상차림을 유지해 오고 있다[17][18].
차례와 기제사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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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례와 기제사의 형식적·내용적 차이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15][18].
| 구분 | 차례 (茶禮)[1] | 기제사 (忌祭祀)[13] |
|---|---|---|
| 의례 성격 | 명절을 맞아 조상께 올리는 가벼운 안부 인사[18][20] | 고인이 서거한 날에 올리는 추모식[15][18] |
| 시기 | 설날, 추석 등 명절 아침/낮[13][15] | 고인의 기일 밤 11시~새벽 1시(자시) 또는 저녁[15][21] |
| 대상 | 4대조 이하 조상 전원 공동[2][5] | 특정 고인 및 배우자 |
| 핵심 제수 | 시절 음식 (떡국, 송편 등), 과일 한 쟁반[13][18] | 메(밥), 갱(국), 어동육서 등 격식에 맞춘 풍성한 제수[15] |
| 술 올리는 횟수 | 단헌 (1회)[14][18] | 삼헌 (초헌·아헌·종헌 3회)[9][14] |
| 축문 낭독 | 원칙적으로 생략 (무축단헌)[14][18] | 축문을 작성하여 반드시 낭독 (독축)[22] |
| 원래의 올리던 음료 | 가루차(점다법) 또는 잎차[6] | 술 (주로 맑은 술)[23] |
현대의 차례 문화와 차의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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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전통 차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형식주의적 제례 문화에 대한 반성이 일면서, 차례상에 본래의 의미를 살려 '차'를 다시 올리려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24][25].
일부 불교 단체와 차인(茶人) 단체들은 명절 차례상에 술 대신 맑은 차를 올리는 캠페인을 꾸준히 진행하고 있다[24][26]. 불교의 관점에서는 술이 인간의 정신을 흐리게 만들고 지혜를 빼앗는 음료이기 때문에, 돌아가신 조상의 영가가 집착에서 벗어나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지혜의 상징인 맑은 차를 올려야 한다는 가르침에 기반한다[26].
종가들 사이에서도 이러한 전통 복원의 움직임이 감지된다[24]. 예컨대 조선 시대 사대부 가문 중 충남 논산의 명재 윤증 종가에서는 차례의 본래 뜻을 살려 기름진 전을 올리지 않고 백설기와 과일, 그리고 정갈하게 우린 녹차를 올린다[27]. 또한 울진의 경안 종가(신안 주씨 후손)나 전남 담양의 미암 유희춘 종가와 같은 일부 종가에서도 제례 순서 중 국을 물리고 차를 올리는 '철갱봉다(撤羹捧茶)'의 전통을 고수하거나 복원하여 실천하고 있다[28]. 이러한 변화는 명절 차례상이 단순히 노동의 고통을 유발하는 형식적 허례허식이 아니라, 차 한 잔을 매개로 조상의 은덕을 되새기며 가족들이 화합하는 따뜻한 차 문화 공간으로 거듭나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24][29].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일연, 《삼국유사(三國遺事)》, 1281년경
- 주희, 《주자가례(朱子家禮)》
- 한국학중앙연구원, '차례(茶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국립민속박물관, '차례(茶禮)', 한국세시풍속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