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사기
분청사기(粉靑沙器)는 고려 말기 상감청자의 쇠퇴를 거쳐 조선 전기에 걸쳐 제작된 한국 고유의 도자기다[1][2]. 회색 또는 회흑색의 태토 위에 백토(화장토)를 입혀 다양한 기법으로 표면을 장식한 후 청자 계열의 투명한 유약을 시유하여 번조하는 것이 특징이다[1][3].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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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는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의 준말로, 회청색 흙으로 그릇을 만든 뒤 그 표면에 하얀 백토를 분장하여 꾸민 자기를 가리킨다[1][4].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들이 부르던 '미시마테(三島手)'라는 불명확한 명칭에 대응하여, 1930년대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이 도자기의 본질을 담아 '분장회청사기'라 새롭게 명명한 데서 유래하였다[5]. 고려청자의 귀족적이고 섬세한 비색 미감에서 벗어나 조선의 유교적 실용성과 서민적인 분방함을 담아내었으며, 청자에서 백자로 이행하는 과도기적 양상을 보여주면서도 약 200년간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하였다[1][6].
역사적 배경과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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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의 탄생은 14세기 말 여말선초의 극심한 정치·사회적 혼란상과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7][8]. 고려 말 왜구의 잦은 침입으로 인해 강진과 부안 등 해안가에 집중되어 있던 대규모 청자 가마들이 파괴되자, 도공들은 내륙 곳곳으로 흩어져 소규모 가마를 짓고 조업을 이어갔다[7]. 이 과정에서 관리가 소홀해진 수비(水飛) 공정으로 인해 태토의 질이 떨어지고 유색이 어두워지자, 도공들은 거친 표면을 가리고 품질을 보완하기 위해 표면에 하얀 흙(백토)을 바르는 분장 기법을 고안하였다[3][9].
분청사기의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분류된다[10].
- 태동기 (14세기 말 ~ 15세기 초): 쇠퇴한 상감청자의 문양이 간략화되면서 백상감과 도장을 찍어 누르는 인화 기법이 태동하였다[11]. 이 시기의 그릇은 태토가 비교적 거칠고 기벽이 두꺼웠다[10].
- 발전기 (15세기 전반 ~ 중반): 세종 및 세조 연간에 이르러 국가 공납 체계가 정비되면서 전국에 수많은 자기소와 도기소가 설치되었고 품질이 급격히 향상되었다[7][11][12]. 관청 이름 등의 명문(銘文)이 새겨진 인화분청사기가 제작되었으며, 박지·조화·철화 등 화려하고 개성 넘치는 기법들이 고안되어 절정에 달하였다[11].
- 쇠퇴 및 소멸기 (15세기 후반 ~ 16세기 중반): 경기도 광주 일대에 사옹원(司饔院) 분원(分院)이 설치되어 왕실 전용 백자가 본격적으로 생산되자 분청사기는 관용자기에서 밀려나 민간 일상용 도자기로 전환되었다[11]. 16세기에 이르러서는 점차 장식이 최소화되고 붓으로 쓱 쓸어내리거나 백토물에 덤벙 담그는 귀얄 및 덤벙 기법 위주로 간소화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조선 백자에 흡수되거나 임진왜란을 거치며 가마가 소멸하였다[1].
제작 기법과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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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는 표면을 하얀 백토로 분장하는 방식과 문양을 장식하는 기법에 따라 크게 일곱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4][13].
| 분류 (기법명) | 장식 및 표현 방식 | 주요 특징 및 산지 |
|---|---|---|
| 상감 (象嵌) | 표면에 무늬를 음각하고 그 홈에 백토나 자토를 메워 문양을 나타내는 기법[3] | 고려 상감청자의 맥을 이은 가장 이른 시기의 기법 |
| 인화 (印花) | 무늬가 새겨진 도장을 표면에 반복적으로 찍은 뒤 백토를 채워 넣는 기법[3] | 국화나 꽃무늬가 연속되어 추상적이고 정돈된 균형미를 제공하며 경상도 지방에서 번성[14] |
| 박지 (剝地) | 그릇 전면에 백토를 입힌 후 무늬를 그리고, 무늬 외의 배경을 긁어내어 회색 태토가 드러나게 하는 기법[3] | 흰 문양과 회흑색 바탕이 선명한 대조를 이루며 주로 전라도 고흥 등지에서 성행[3] |
| 조화 (彫花) | 백토를 분장한 뒤 뾰족한 도구로 무늬의 윤곽선을 오목새김(선각)하는 기법[3][4] | 선이 매우 유려하고 소박하며 모란문, 어문 등이 자유분방하게 시문됨[3][15] |
| 철화 (鐵畫) | 백토를 입힌 뒤 철분이 함유된 안료(철사)로 붓을 사용해 그림을 그려 넣는 기법[3][4] | 구우면 흑갈색 무늬가 나타나며, 충남 공주 계룡산 학봉리 가마터에서 생산된 계룡산 분청이 대표적[15] |
| 귀얄 | 넓적한 솔(귀얄)에 백토물을 묻혀 표면을 거침없이 쓸어 장식하는 기법[3] | 붓자국의 역동적인 흔적과 속도감이 극대화되어 현대 추상회화와 같은 예술미를 선사[16] |
| 덤벙 (담금분장) | 굽 부분을 잡고 백토 물에 담갔다가 꺼내어 전면을 백색으로 뒤덮는 기법 | 분청사기의 최후기 기법으로 백자를 모방하고자 한 시도에서 비롯되었으며 자연스러운 흘러내림이 독특함 |
동아시아 차 문화와의 연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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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로 제작된 대접과 사발은 조선 사회의 실생활용 그릇인 동시에 찻물을 담아 마시는 찻사발, 즉 다완(茶碗)으로 널리 사용되었다[14][17]. 이는 한국뿐 아니라 바다 건너 일본의 차 문화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17][18].
천목다완과의 대비
중국의 송나라와 고려 시대에는 건안성의 건요나 장시성의 길주요 등에서 생산된 검은 빛의 천목다완이 왕실과 귀족의 찻자리를 독점하고 있었다[19]. 인위적으로 통제된 가마 내부에서 빚어진 요변(窯變) 현상이나 정교한 장식성이 특징인 천목다완은 권위적이고 화려한 차 문화를 상징하였다[20]. 이와 대조적으로 조선의 분청사기 다완은 가식과 장식을 걷어내고 흙 본연의 질감을 살려 자연스럽게 빚어졌다[16]. 거친 모래가 섞인 태토, 흘러내리는 백토, 불완전하게 녹아내린 유약 등은 인위적인 완벽함을 거부하는 소박한 매력을 뽐내며 동아시아 찻그릇 미학의 전환점을 가져왔다[16][17].
일본 와비차로의 전파와 미시마 다완
15~16세기 일본에서는 화려한 당물(唐物) 다구를 뽐내던 사치스러운 다도 방식에 반발하여, 내면의 정신과 소박한 부족함의 미를 숭상하는 와비차가 대두하였다[20][21]. 센노 리큐를 비롯한 일본의 다인들은 조선에서 건너온 질박한 분청사기 대접을 보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이를 와비 정신의 극치를 담은 명물 다완으로 격상시켰다[17][22].
일본에서는 특히 조선의 분청사기 다완을 '미시마(三島) 다완'이라 칭하며 귀하게 여겼다. 표면에 가늘고 촘촘하게 박힌 인화 무늬가 일본 시즈오카현 미시마 신사에서 발행한 책력의 글자 배열과 유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5]. 이 밖에도 붓자국이 선명한 귀얄분청은 '하케메(刷毛目)', 백토물에 무심히 담갔다 꺼낸 덤벙분청은 '코히키(粉引)'라 부르며 최고급 찻그릇으로 수장하였다[23]. 전라남도 보성 일대에서 제작된 덤벙분청 다완인 '보성 덤벙이(호조 코히키)'는 일본 다도계에서 국보급 대명물(大名물)로 대접받고 있으며, 조선의 또 다른 다완 명작인 이도다완과 더불어 일본 다완 문화의 정점을 형성하였다[21].
다완으로서의 물리적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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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청사기 다완이 찻그릇으로서 오랫동안 찬사받은 비결은 독특한 물리적 특성에 기인한다.
- 차심(茶心)의 변화: 분청사기 다완은 태토의 밀도가 비교적 낮고 표면에 자연스러운 빙열(유약 표면의 미세한 갈라짐)이 형성되어 있다[10][23]. 다완을 오래 쓸수록 이 미세한 균열 사이로 말차의 찻물이 스며들게 되는데, 이를 '차심이 밴다'고 표현한다[23]. 세월의 깊이와 차맛이 그릇에 배어드는 이러한 변화는 다인들에게 높은 미학적 평가를 받는다[23].
- 자연주의와 무심성: 흙을 고르고 정제하는 수비 과정을 거칠게 하여 돌가루나 불순물이 그대로 노출되기도 하고, 기벽의 두께나 굽의 형태도 대범하게 깎아내어 일정한 규칙을 두지 않는다[16]. 이처럼 인위성을 배제한 '무작위의 미' 혹은 "무기교의 기교"는 완벽함만을 추구하던 동아시아 도자 공예계에 큰 사상적 울림을 주었다[24].
- 다채로운 찻물과의 대조: 말차를 격불하여 생겨나는 초록색 거품과, 분청사기의 투박한 회백색 피부는 극적인 색채 대조를 이룬다[25]. 찻그릇 안쪽의 백토 분장과 바깥 굽 언저리에 드러난 태토의 어두운 비색이 어우러지면서 찻자리에 은은한 풍류를 자아낸다[25].
현대적 계승과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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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기 중반 분청사기는 백자의 득세로 인해 소멸하였으나, 현대 도예가와 다인들에 의해 그 예술적 의의가 재조명받고 있다[1][6]. 영국의 현대 도예가 버나드 리치는 분청사기를 두고 "속물적인 구석이 전혀 없는 자연스러움의 극치"라며 찬탄하였고, 현대 도자 예술이 나아갈 길이 이미 분청사기 기법 안에 녹아들어 있다고 극찬하였다[8].
오늘날 전남 보성, 경남 김해, 충남 공주 등 옛 분청사기 도요지를 중심으로 활발한 가마 복원과 작가들의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귀얄과 덤벙 기법은 현대 조형 예술과 다구 제작에 있어 필수적인 표현 수단으로 당당히 자리 잡고 있다[1][6][16]. 특히 차의 본래 성질을 해치지 않고 오히려 기물의 자연스러운 질감을 통해 찻자리의 평온함을 돕는 실용적 다구로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16].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강경숙, 《한국 도자사》, 일지사, 1989.
- 국립중앙박물관, 《명품 분청사기》, 국립중앙박물관, 2001.
- 신한균, 《우리 사발 이야기》, 가람기획,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