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도다완
이도다완(井戶茶碗)은 15세기에서 16세기 조선 남부 지방의 민요(民窯)에서 생산되어 일본으로 건너간 찻사발(다완)로, 일본 다도(茶道)의 황금기인 모모야마 시대에 와비차의 미적 가치를 대변하며 최고의 다기로 받들어진 도구이다[1][2]. 거칠고 소박하지만 당당한 형태를 지닌 이 도자기는 일본에서 국보 및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예술적·역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평가받고 있다[3].
어원 및 명칭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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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다완'(한국 한자음으로 정호다완)이라는 명칭의 구체적인 유래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정설이 없으며, 다음과 같은 여러 가설이 존재한다.
- 인명설: 임진왜란 당시 도자기를 수집하거나 왜란에 참전한 일본 무장인 이도 산주로(井戶三十郞)의 성씨에서 따왔다는 주장이다.
- 지명설: 조선 경상남도 지역의 옛 지명 중 하나인 '위등(韋登)'의 일본어 발음이 '이도'와 유사하여, 이 지역의 가마에서 생산된 것에서 유래했다는 가설이다. 또한, 경상남도 사천 등지에서 '새미골'(우물이 있는 골짜기)이라 불리는 가마터에서 제작되었다는 설도 포함된다[4].
- 유약설: 도자기에 칠하는 유약을 의토(衣土)라고 불렀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견해이다.
- 형태설: 찻사발 내부 바닥에 깊게 파인 부분(차고임 자리)을 내려다보았을 때, 깊은 우물(일본어로 '이도')을 연상시킨다는 점에 기반한 설이다[5].
역사적 배경 및 일본으로의 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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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일본 다도계에서는 12세기 말 중국 송나라 등에서 수입한 고급스럽고 정교한 자기를 '카라모노(唐物, 당물)'라 부르며 다회(茶會)의 주요 도구로 사용하였다[6][7]. 그러나 실용성과 화려함만을 숭상하던 다도 문화에 대한 반발이 생겨나며 소박함 속에서 본질을 추구하는 와비차가 대두되었다[6][7].
16세기 센노 리큐(千利休) 등의 차인(茶人)들은 정형화되고 완벽한 중국의 천목다완 대신, 비대칭적이고 투박하며 자연스러운 조선의 사발에 매료되었다[6][8]. 일본의 무사 및 권력자들은 이도다완을 영토나 성곽과도 바꿀 수 있을 정도의 천하 명물로 보아 수집에 열을 올렸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역시 이도다완을 극도로 애호하였다[6][9]. 이러한 다구에 대한 열광은 임진왜란 당시 왜장들이 조선 남부 지방의 가마를 약탈하고 사기장들을 포로로 대거 납치해 가는 역사적 사건(도자기 전쟁)으로 이어지게 되었다[9][10].
조형적 특징 및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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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다완은 현대 다도계에서 규정하는 '이도의 약속(井戸の約束)'이라는 고유의 미적·제작적 특징을 만족해야 정식 이도다완으로 분류된다[11]. 인위적인 기교를 배제하고 자연의 순리를 따른 조선 도자기 고유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 비파색(枇杷色) 표면: 사발 전체에 주홍빛 또는 누런빛이 감도는 비파나무 열매 색의 은은한 유약(비파색)이 시유되어 있다[12][13].
- 물레자국(ろくろ目): 물레를 돌려 그릇을 성형할 때 도공의 손가락이 지나간 궤적이 수평의 줄무늬처럼 뚜렷하고 거칠게 남아 있다[14].
- 죽절굽(대나무 마디형 굽): 사발 밑바닥의 굽이 대나무 마디처럼 높고 힘차게 깎여 있어 당당한 품격을 지닌다. 굽 안쪽 중앙에는 볼록하게 솟아오른 소용돌이 모양의 돌기(두건)가 관찰된다.
- 매화피(梅花皮, 가이라기): 유약이 고온에서 덜 녹아 응결되거나 가마 속 온도 변화로 인해 굽 주변부에 몽글몽글하게 맺혀 갈라진 무늬이다[15]. 이 울퉁불퉁하고 거친 질감이 칼의 손잡이에 감싸는 철갑상어 가죽(가이라기)과 닮았다고 하여 무사들에게 사랑받았다.
- 빙열(氷裂): 표면의 반투명 유약 층에 얇고 미세하게 갈라진 그물망 형태의 잔금이 분포되어 있다[16].
- 물고임 자리(울안): 차를 다 개어 마신 뒤 사발 안쪽 바닥 중앙에 말차가 고이도록 깊숙하게 파인 공간이 형성되어 있다[16].
분류 및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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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다완은 크기, 형태, 유약의 발색에 따라 크게 다음과 같은 유형으로 구분된다.
| 분류 | 특징 | 주요 소장품 예시 |
|---|---|---|
| 오이도(大井戶) | 대정호라고도 부르며, 구경(지름)이 약 15cm 이상인 크고 당당한 형태의 다완이다. 이도다완의 전형적인 미적 기준을 가장 잘 충족하며 기품이 느껴진다. | 기자에몬(喜左衛門), 쓰쓰이쓰쓰(筒井筒), 호소카와(細川) |
| 고이도(古井戶 / 小井戶) | 소정호라고도 부르며, 오이도에 비해 상대적으로 아담하고 작은 규격의 다완이다[17]. 굽이 다소 낮으며, 굽 주변의 매화피가 도드라지지 않으나 다양한 유색의 변화를 보여준다. | 로쿠지조(六地藏), 와스레미즈(忘水) |
| 아오이도(靑井戶) | 청정호라고도 부르며, 흙(태토)과 유약에 철분이 함유되어 표면에 푸르스름하거나 회청색의 빛깔이 도는 다완이다. 대체로 몸통이 낮고 구연부가 넓다. | 시바타(柴田) |
| 평이도(平井戶) | 접시처럼 넓고 얕은 기형을 지니고 있어 차가 쉽게 식기 때문에 여름철에 주로 사용하는 다완이다. | - |
| 이도와키(井戶脇) | 이도다완의 아류 혹은 유사한 성격을 지닌 주변부 다완으로, 물레자국이 거의 보이지 않고 전체적으로 기벽이 얇은 편이다[17]. | 나가사키(長崎) |
주요 명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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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에는 이도다완 명물이 보존되어 있으며, 그중 역사성과 미적 완성도가 탁월한 작품들이 국보나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3].
- 기자에몬 이도다완 (喜左衛門 井戶): 현재 일본 교토 다이도쿠지(大德寺)의 고호안(孤篷庵)에 소장되어 있는 일본의 국보이다. 이도다완 중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며, 최초 소장자였던 오사카의 상인 다케다 기자에몬(竹田喜左衛門)의 이름에서 명칭이 유래하였다. 비파색 표면, 깊은 물레자국, 풍성한 매화피 등 이도의 고유성을 완벽하게 간직하고 있어 와비 정신의 정수로 평가받는다[7]. 전설에 따르면 이 다완의 소유주들이 연이어 종기나 욕창을 앓았기 때문에, 대다이묘였던 마쓰다이라 후마이(松平不昧)의 후손들이 재앙을 피하기 위해 대덕사에 기증했다고 전해진다[18].
- 쓰쓰이쓰쓰 이도다완 (筒井筒 井戶):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지정된 오이도다완이다. 전국시대 야마토 국의 다이묘였던 쓰쓰이 준케이(筒井順慶)가 소장했던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헌상된 다완 중 하나로 역사적 일화가 깊다[18].
- 호소카와 이도다완 (細川 井戶): 또 다른 국보급 위상을 지닌 대명물로 하타케야마 기념관(畠山記念館)에 소장되어 있으며, 일본의 중요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다. 다이묘 호소카와 산사이(細川三齋)가 애장하였다.
제작 용도에 관한 학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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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다완의 한반도 내 본래 제작 용도와 관련해서는 한·일 학계 및 도예계에서 오랜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3].
- 막사발 및 잡기설: 20세기 초 일본의 미학자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주장한 설로, 조선 서민들이 밥그릇, 국그릇 혹은 막걸리 잔으로 아무렇게나 일상적으로 쓰던 '막사발'이 일본으로 건너가 명물로 재평가받았다는 견해이다[18]. 이 관점은 기교 없는 평범함 속의 아름다움을 예찬하는 민예론의 주축이 되었으나, 도자기를 구워낸 기술적 난도를 과소평가했다는 비판을 받는다[19].
- 제기 및 발우설: 조선시대 제례에서 사용하던 제기(祭器)이거나, 혹은 절에서 승려들이 밥을 먹는 바루(발우)였다는 견해이다[20]. 이도다완 특유의 굽 형태와 규격, 물고임 자리의 정밀한 제작 수준은 당대 숙련된 일류 도공이 특수한 목적으로 가공한 증거이며, 흙의 성비와 불 조절 등 고도의 정교한 기술이 투입된 기물이라는 분석에 기반한다[8].
현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도다완의 대다수는 조선 15~16세기 경상남도 남동해안 일대(오늘날의 웅천, 하동, 사천 등)의 민간 가마에서 집중적으로 생산되었으며, 당대의 사질 토양과 자연 재료를 조합하여 번조된 도자기인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1][21].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과 그 예술》, 학고재, 2006
- 정양모, 《한국의 도자기》, 문예출판사, 1991
- 신한균, 《우리 사발 이야기》, 규장각,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