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나기 무네요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悦, 1889~1961)는 일본의 종교철학자, 미술평론가이자 민예(民藝) 운동의 창시자이다[1]. 그는 일상생활 속에서 사용되는 무명 장인들의 생활 잡기에서 가공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일본 다도(茶道)의 본질적 미학과 연결 지어 재해석함으로써 근대 공예학 및 다구(茶具) 감상론에 큰 족적을 남겼다[2][3].
생애와 사상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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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는 1889년 일본 도쿄에서 해군 소장의 아들로 태어나 가쿠슈인(學習院) 고등부를 거쳐 도쿄 제국대학 철학과를 졸업하였다[1][4]. 청년 시절에는 무샤노코지 사네아쓰, 시가 나오야 등과 함께 문예지 《시라카바(白樺)》의 창간과 편집에 참여하며 서양의 철학과 근대 미술을 일본에 소개하는 데 앞장섰다[1][5].
그는 영국의 도예가 버나드 리치(Bernard Leach)를 통해 신비주의 시인이자 화가인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의 사상에 깊이 매료되었다[6][7]. 블레이크의 종교적 신비주의와 인간의 직관을 중시하는 태도는 그의 초기 사상 형성에 뼈대를 이루었다[6]. 이후 야나기는 서양 사상에 대한 추종에서 벗어나 동양의 노장 사상과 대승 선불교 이론을 깊이 연구하였으며, 사물의 조형적 아름다움과 종교적 깨달음의 경지가 본질적으로 하나라는 '종교미학' 체계를 구축하기에 이르렀다[6][7].
조선 공예와의 만남과 인식의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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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가 동양 고유의 미에 완전히 눈을 뜨고 인생의 방향을 전환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조선 도자기와의 만남이었다[3][6]. 1914년 가을, 조선에서 공립소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아사카와 노리타카(浅川伯教)가 도쿄의 야나기 자택을 방문하여 조선의 '백자청화초화문각병'을 선물하였다[8]. 야나기는 이 작은 백자 병이 지닌 부드러운 선과 소박하면서도 범접할 수 없는 품격에 큰 충격을 받았다[8].
이후 그는 1916년부터 1940년까지 약 21차례에 걸쳐 조선반도 전역을 여행하며 가마터와 민가를 답사하였다[7][9]. 그는 청자뿐만 아니라 당시 골동품 학계에서 외면받던 조선의 백자, 소반 등의 목공예, 자수, 민화 등 일반 민중이 사용하던 생활용품을 대대적으로 수집하였다[9][10].
조선의 예술을 보호하고 널리 알리고자 그는 1924년 경복궁 집경당에 세계 최초의 민간 박물관 중 하나인 '조선민족미술관'을 개관하였다[7][10]. 또한, 일제가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위해 광화문을 철거하려 하자 동아일보에 강력한 철거 반대 기고문인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 건축물에 대하여'를 발표하는 등 식민지 지배하에 있던 조선 문화의 독자적 가치를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1][5]. 이러한 조선 공예와의 만남은 그가 귀족 중심의 화려한 미술품 대신, 평범한 민중이 일상에서 사용하는 공예품의 미적 가치를 격상시키는 '민예' 사상을 창안하는 결정적 토대가 되었다[6].

'무작위'의 미학과 다구의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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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는 공예품의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무심(無心)', '무작위(無作爲)', '무의식(無意識)'의 경지에서 찾았다[9]. 장인이 예술가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기교를 부리거나, 미(美)와 추(醜)를 분별하려는 마음을 품고 만든 기물은 도리어 생명력을 잃는다고 보았다[11]. 오직 무명의 장인이 일상적인 쓰임을 위해 묵묵히 반복적인 노동 속에서 빚어낸 그릇이야말로 인위적인 작위성이 배제된 '본연의 아름다움'을 지닌다는 것이다[6][11]. 그는 이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태어난 미"라고 명명하였다[9].
이러한 미학은 일본 다도의 핵심 사상인 '와비(侘び)'와 일맥상통한다[3][12]. 야나기는 다도가 기계적인 예법이나 희귀하고 비싼 명물(名物) 감상에만 집착하는 형식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경계하였다[2][3]. 참다운 다도구는 본래 화려하게 장식된 예술품이 아니라, 견고하고 실용적인 생활 잡기여야 하며 다인은 기물의 본래적 쓸모 속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2][3]. 그는 다구의 자격을 결정하는 요소를 인위적 꾸밈이 아닌 '자성의 아름다움'과 '본분의 아름다움'으로 규정하고, 미와 추가 구분되기 이전의 불이(不二)의 미학을 다도에서 추구하였다[13].
고려다완과 기자에몬 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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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의 다도 이론과 공예 미학을 집대성한 저술은 《다도와 일본의 미(茶と美)》(1941)이다[2][3]. 그는 이 책을 비롯한 여러 다도 논집에서 조선에서 건너가 일본 다도의 최정상에 군림하게 된 찻사발인 '고려다완(高麗茶碗)'을 집중적으로 조명하였다[2][14]. 특히 대명물(大名物)이자 일본의 국보인 '기자에몬 이도(喜左衛門井戶)'를 직접 관찰한 경험을 토대로 자신의 다도관을 구체화하였다[3].
1931년 교토 대덕사(大德寺) 고련암(孤篷庵)에서 기자에몬 이도를 마주한 야나기는 그것이 특수한 예술품이 아니라, 조선의 가난한 민중이 밥공기나 국그릇 등으로 편안하게 사용하던 지극히 평범한 일상용 '잡기'라는 사실을 지적하였다[15][16]. 그는 이 거칠고 비틀어졌으며 유약이 엉겨 붙어 흘러내린 사발이 천하제일의 다완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던 이유를 세 가지로 규정하였다[16].
- 무심과 평범함: 도공이 어떠한 예술적 자의식도 없이 수없이 물레를 돌려 빠르게 빚어냈기에 기교나 뽐냄의 흔적이 없다[11].
- 자연과 타력(他力): 기물의 형태와 색은 인간의 통제 수준을 벗어나 가마 안의 장작불과 흙의 성질 등 자연의 위대한 힘에 의탁하여 태어났다[2][17].
- 초기 다인들의 직관: 무라타 주코나 센노 리큐와 같은 다도의 선구자들은 기성의 가치관이나 권위에 얽매이지 않고, 이 소박하고 거친 조선 사발에서 와비차의 극치인 고요함과 평상심을 단번에 알아보았다[3][17].
야나기는 고려다완의 자연적 미감을 대조적인 사례인 일본의 라쿠 다완과 비교하여 설명하기도 하였다[18]. 라쿠 다완은 다도의 예술적 미학을 구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빚어진 '작위적인 소박함'의 산물인 반면, 고려다완은 아무런 의도 없이 자연 속에서 탄생한 '무작위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분석이다[17][18].
| 구분 | 고려다완 (이도다완) | 라쿠 다완 |
|---|---|---|
| 제작 동기 | 조선 민중의 일상적 쓰임 (생활 잡기)[15][16] | 다도 미학을 구현하기 위한 전용 다구[19] |
| 미적 지향 | 무심, 무기교, 불균형, 무작위[9][20] | 의도된 소박함, 인위적인 단순미[17][18] |
| 핵심 동력 | 흙과 장작불 등 자연의 타력(他力)[2][17] | 장인의 세밀한 통제와 자력(自力) |
한계와 현대적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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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 공예론과 다도 미학은 식민지 지배 상황 속에서 한국 예술의 고유한 가치를 발굴하고 보호하는 데 기여했다는 찬사를 받지만, 현대에 이르러서는 날카로운 학술적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5][21].
가장 대표적인 비판은 그가 조선 예술의 본질을 '비애(悲哀)의 미' 혹은 '선의 미', '백색의 미'로 규정했다는 점이다[22]. 야나기는 조선의 미를 가혹한 역사적 고난을 겪은 민족의 쓸쓸하고 슬픈 정서가 반영된 결과로 설명하였는데, 이는 조선인의 예술을 수동적이고 운명론적인 범주에 가두어 일제의 식민 지배를 내면적으로 순응하게 만드는 '식민지 숙명론' 및 오리엔탈리즘적 시선과 궤를 같이한다는 지적을 받는다[21].
또한, 이도다완을 비롯한 고려다완을 조선 하층민들이 마구 사용하던 '잡기'나 '막사발'로 단정한 그의 주장은 현대 도자사 연구와 발굴 성과에 의해 사실과 다름이 입증되었다[15]. 당시 조선의 하층민들은 자기(瓷器)로 된 그릇을 일상적으로 사용하기 어려운 생활사적 환경에 있었으며, 이도다완의 정교한 굽 구조와 형태적 특징을 고려할 때 이는 마구 쓰이던 막사발이 아니라 제례용 제기(祭器)이거나 고도로 훈련된 사기장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제작된 특수 기물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15]. 야나기의 '무작위설'은 조선 도공들의 뛰어난 예술적 주체성과 숙련된 작위적 기술을 단순한 우연이나 무의식의 산물로 평가절하하는 한편, 이를 명물로 발굴해 낸 일본 다인들의 직관적 안목만을 미화하는 제국주의적 수집가의 자아를 투영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23].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야나기 무네요시 저, 이길주 역, 《다도와 일본의 미》, 신라출판사, 1996.
- 야나기 무네요시 저, 김순희 역, 《조선을 생각한다》, 학고재, 1996.
- 한영혜, '야나기 무네요시의 조선 인식과 그 정치성', 《한일민족학연구》, 20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