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기야키
하기야키(萩焼)는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시(萩市) 일대에서 제작되는 전통 도기(陶器)로, 조선의 분청사기 및 도예 기술에 뿌리를 두고 발전한 일본의 대표적인 다도구이다[1][2]. 다공질의 거친 흙과 두터운 유약, 표면의 미세한 균열(관입) 사이로 찻물이 배어들며 색조가 깊어지는 심미적 특성으로 인해 일본 다도계에서 최고의 다완 가운데 하나로 평가받는다[3][4].
기원과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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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키의 기원은 16세기 말 정유재란(1597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2][5]. 조슈번(長州藩)의 영주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에 의해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의 도공 이작광(李勺光)과 이경(李敬) 형제가 개창조(開創祖)이다[2]. 이들은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 가문이 본거지를 하기로 옮기자, 1604년 번주의 명을 받아 조카마치(성하도시) 외곽의 마쓰모토(松本) 지역에 번영 가마(藩窯)인 마쓰모토가마를 축조하고 도자기 생산을 시작했다[2][5].
이경은 이후 번주로부터 '사카 고라이자에몬(坂高麗左衛門)'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으며 가업을 계승했고, 그의 가계는 사카 가문으로 이어져 오늘날까지 번요의 정통을 전수하고 있다[2]. 한편 17세기 중반에는 후카가와(深川, 현 나가토시 센자키 인근) 지역에 또 다른 가마가 설립되었으며, 이곳에서는 미와 규세쓰(三輪休雪)를 시조로 하는 미와 가문이 교토 라쿠야키의 기법을 접목하며 독창적인 양식을 개척했다[2].
에도 시대 동안 하기야키는 번의 비호 아래 다도용 어용품(御用品)이나 증여용 기물로 한정 생산되어 일반 시장에 유통되지 않았다. 그러나 메이지 유신(1868년)으로 번의 후원이 중단되자 일시적인 재정적·기예적 위기를 겪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10대 사카 고라이자에몬과 8대 미와 규세쓰 등 명장들이 민수용 식기와 차 도구 시장을 적극적으로 개척하고 전시회에 출품하며 예술 도자기로서의 위상을 재정립했다. 1957년에는 일본 국가 전통 공예품으로 지정되었으며, 10대 미와 규세쓰(미와 쥬세쓰)와 11대 미와 규세쓰 등이 인간국보(중요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받으면서 전통의 계승과 현대적 변용이 함께 이어지고 있다[2].
원료와 제작 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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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키의 질감과 색채는 하기 지역과 인근 지층에서 채취되는 독특한 점토의 배합에서 비롯된다[4]. 단일 점토만을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며, 입자 크기와 가소성, 내화도가 서로 다른 흙을 정밀하게 조합한다[4].
- 다이도토(大道土): 호후시(防府市) 다이도 주변에서 채굴되는 백색의 사질 점토이다. 규산분과 석영 입자가 풍부하여 내화도가 높고 건조 및 소성 수축률이 낮다. 다공성을 형성하는 핵심 원료이다.
- 미타케토(三岳土): 하기시 인근 미타케산에서 산출되는 적갈색 점토이다. 철분 함량이 높아 소성 후 붉은 기운을 띠며, 점력이 뛰어나 기물의 형태를 잡는 가소성을 부여한다[3].
- 미시마토(見島土): 하기시 앞바다의 미시마섬에서 채취되는 철분이 매우 많은 붉은 흙이다. 유약 아래에서 철분 발색을 유도하거나 흙의 결을 거칠게 연출할 때 소량 첨가된다[4].
흙의 불순물을 거르고 알맞은 입도를 얻기 위해 물에 점토를 풀어 가라앉히는 수비(水飛) 과정을 거친다. 너무 곱게 거르면 특유의 질박함이 사라지므로, 굵은 모래 입자가 적절히 남도록 수비 강도를 조절하는 것이 특징이다.

성형을 마친 기물은 음지에서 서서히 건조한 뒤 700800℃에서 초벌구이를 거친다. 이후 장석(長石) 분말에 나무나 짚을 태운 재를 섞어 만든 천연 유약을 입힌 뒤, 전통 등요(登り窯, 오름가마)에서 1,2001,250℃ 내외로 재벌구이를 진행한다[2]. 이 과정에서 산소 공급을 제한하는 환원염(還元焰) 분위기를 조성하여 태토 속 산화철(Fe2O3)을 환원 상태(FeO)로 변화시킴으로써 미묘한 회청색, 연분홍색, 비파색의 색조를 이끌어낸다.
형태 및 심미적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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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키는 조선 분청사기의 소박하고 당당한 조형미를 계승하면서도, 다도 문화에 맞추어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완성했다.
관입과 하기의 칠변화
하기야키의 가장 상징적인 특징은 '하기의 칠변화(萩の七化け, 하기노 나나바케)'라 불리는 경년 변화(經年變化)이다[3][4]. 본벌구이를 마친 도자기가 식는 과정에서 열팽창률이 큰 태토와 유리질 유약의 수축률 차이로 인해 표면에 그물망 형태의 미세한 균열인 관입(貫入, 빙렬)이 형성된다[3].
이 다완으로 차를 반복해서 마시면, 다공질의 흙과 관입 사이로 차의 수분과 탄닌, 미세 침전물이 스며들게 된다[3]. 오랜 세월 사용함에 따라 그릇 내외부의 색상이 차분하게 가라앉고, 빙렬선이 짙어지며, 윤택한 고색(古色)을 띠는 차지(茶漬) 현상이 일어난다[3]. 일본의 다인들은 도자기가 완성된 완제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용자가 차를 마시며 기물을 길들이는 '차나레(茶慣れ)' 과정을 통해 비로소 완성된다고 여긴다[3].
키리코다이(切高台, 절고대)
하기야키 다완의 바닥 굽(高台, 코다이)에는 칼로 삼각형이나 사각형, 일자형으로 홈을 파낸 기법이 자주 나타나는데, 이를 '키리코다이'라 부른다. 이에 대해서는 여러 해석이 존재한다.
- 조선 도자 전통의 계승: 분청사기 제기나 사발의 굽을 깎던 기법이 장식적 요소로 정착했다는 설이다.
- 어용품 규율 회피설: 번요 시절 백성들이 관용(官用) 도자기를 사사로이 소유하거나 판매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도공들이 의도적으로 굽에 흠집을 내어 파손품이나 불합격품으로 위장한 뒤 민간에 유통했다는 구전이다.
- 실용적 기능설: 차를 마신 후 물로 헹구어 엎어 말릴 때 굽 안쪽에 물이 고이지 않고 잘 빠지도록 하거나, 다회에서 손가락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마찰력을 높이기 위한 고안이라는 견해이다.
흙과 유약의 대비
하기야키는 태토 자체의 거칠고 부드러운 맛(土味, 쓰치아지)을 가리지 않는다. 기물 전체에 유약을 빈틈없이 칠하기보다는 굽 주변이나 몸통 일부를 무유(無釉) 상태로 남겨 흙의 원초적 질감을 드러낸다. 손에 쥐었을 때 도자기의 묵직함 대신 가볍고 부드러우며 체온이 따뜻하게 전해지는 연질 도기의 물리적 촉감을 제공한다[3].
주요 양식과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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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야키는 사용되는 유약의 성분, 도포 방식, 흙의 배합에 따라 뚜렷이 구별되는 양식으로 나뉜다.
| 양식명 | 특징 및 유약 | 외관 및 색조 | 주요 용도 |
|---|---|---|---|
| 비와이로(枇杷色) | 투명한 장석유를 얇게 시유하여 태토의 철분이 비치도록 소성 | 비파 열매를 닮은 은은한 황갈색, 살구색, 연분홍빛[4] | 격조 높은 전통 말차 다완 |
| 시라하기(白萩) | 짚재를 많이 배합한 백유(白釉)를 두껍게 흘려 씌움 | 우윳빛의 불투명한 유백색, 굵은 관입 네트워크 형성[3][4] | 농차용 다완, 화병, 찻잔 |
| 오니하기(鬼萩) | 다이도토에 거친 모래 알갱이를 다량 섞고 짚재유를 두껍게 시유 | 표면이 우둘투둘하고 박력 있는 균열과 눈물자국 형성 | 현대 예술 다완, 개성적인 차도구 |
| 청하기(青萩) | 유약에 목탄재나 식물재를 섞어 환원 소성 | 짚재유 바탕에 연한 녹청색 또는 청회색의 실투성 유리질 형성 | 화기, 식기, 박차용 찻잔 |
다도 문화에서의 위상과 취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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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도 문화에서 하기야키는 독보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다. 다인들 사이에서 구전되는 대표적인 격언인 **"이치라쿠, 니하기, 산카라쓰(一楽二萩三唐津)"**는 차회에서 가장 으뜸으로 치는 다완의 서열을 뜻하며, 교토의 라쿠야키(楽焼)에 이어 하기야키를 두 번째로 꼽는다[3]. 화려한 문양이나 채색을 배제하고 흙과 불, 유약의 자연스러운 어우러짐을 중시하는 와비차(侘び茶)의 미의식과 정확히 부합하기 때문이다.
정식 다회인 차카이(茶会)에서 하기야키 다완은 주로 첫 번째 주빈(쇼캬쿠)에게 대접하는 정다완(正茶碗)으로 쓰인다. 짙은 초록색의 농차(濃茶)를 담았을 때, 비파색 바탕이나 유백색의 시라하기 유약 위로 차의 푸른빛이 선명하게 대비되어 시각적 조화를 이룬다.
하기야키는 소성 온도가 비교적 낮고 기벽 내부에 미세 기공이 많은 연질 도기이므로, 실용적 취급과 관리에 주의가 필요하다.
- 사용 전 준비: 처음 사용하기 전 쌀뜨물이나 미음 등에 다완을 넣고 약한 불로 약 20~30분간 삶아 식히면, 전분 입자가 기공을 메워 급격한 얼룩 형성이나 누수를 방지할 수 있다.
- 차를 낼 때의 예열: 찻물을 담기 직전에 깨끗한 미온수를 부어 기공에 맑은 물을 먼저 머금게 하면, 찻물의 찌꺼기가 한곳에만 뭉쳐 얼룩지는 현상을 완화하고 균일한 경년 변화를 유도할 수 있다.
- 세척과 건조: 화학 세제는 다공질 틈새로 흡수되어 다음 차의 향미를 훼손하므로 따뜻한 물로만 세척하는 것이 원칙이다. 통기성이 낮고 습한 밀폐 공간에 덜 마른 채 보관할 경우 곰팡이나 이취가 발생할 수 있으므로, 세척 후 반드시 통풍이 잘되는 그늘에서 수일간 완전히 건조해야 한다.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전통적공예품산업진흥협회, 《전통적 공예품 편람》, 2020.
- 山口県立萩美術館・浦上記念館 編, 《開館記念特別展 萩焼400年の歩み》, 山口県立萩美術館, 1996.
- 이토 요시아키 외, 《일본도자사》, 미술문화, 20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