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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발

막사발은 조선 시대에 제작되어 민간에서 밥그릇, 국그릇, 술잔 등의 일상 용기나 제례용 제기(祭器)로 사용되었던 사발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임진왜란 전후의 시기에 일본으로 건너가 현지 다도, 특히 와비차(侘び茶) 문화의 중심적인 차사발인 고려다완(高麗茶碗) 및 이도다완(井戶茶碗)으로 재발견되었으며, 인위적인 기교를 배제한 자연스러운 미감으로 동아시아 도자사에서 독특한 미학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1][2].

막사발 도식

관련 항목: 센노-리큐

어원과 명칭의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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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발'이라는 명칭은 조선 시대의 공식 문헌이나 도자 관련 기록에는 나타나지 않는 용어이다[3]. 국어학적 관점에서 '막-'이라는 접두사는 '닥치는 대로', '함부로', '대충'이라는 뜻을 지녀, 막사발은 곧 '막 만든 사발' 혹은 '막 쓰는 사발'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1][4].

이 명칭의 구체적인 유래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대립하고 있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은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의 미술평론가이자 민예연구가인 야나기 무네요시가 조선의 도자기를 '민중 속에서 태어난 실용적 잡기(雜器)'로 규정하며 제창한 '잡기론(雜器論)'에 기반하여 한국인들 사이에서 구어로 정착했다는 견해이다[3][5]. 또한,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도굴꾼과 골동품 상인들이 남해안 일대의 옛 가마터와 무덤을 뒤지며 정형화되지 않은 조선 사발들을 발견했을 때,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던 조선인 안내인들의 입을 통해 '막사발'이라는 호칭이 굳어졌다는 분석도 존재한다[6]. 본래 조선에서는 사발의 크기와 용도, 형태에 따라 밥공기, 보시기, 제기(祭器), 발탕기 등 명확한 명칭이 존재했으나, 근대 이후 이들이 하나의 '막사발'이라는 범주로 통칭되면서 본래의 명칭과 격조가 왜곡되었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3].

형태 및 제법상의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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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사발은 완벽한 대칭이나 매끄러운 표면 처리를 지양하며, 흙과 불의 자연스러운 조화를 극대화하는 제법을 보여준다. 주로 경상남도 진주, 하동, 사천, 창원 등 남해안 일대의 지방 민요(民窯)에서 생산된 분청사기 및 회백자 계열이 그 모태가 된다[1][2].

  • 태토와 성형: 철분이 적당히 함유된 점토(태토)를 사용하여 성형하며, 소성 과정에 따라 회색이나 황갈색을 띤다[5][7]. 물레를 돌려 빠르게 빚어내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생겨난 비대칭적 선과 손가락 자국이 몸체에 고스란히 남는다[8].
  • 시유 기법: 그릇 전체를 유약통에 덤벙 담갔다가 꺼내는 '덤벙이(분인)' 기법이나, 거친 솔이나 붓으로 유약을 칠하는 '귀얄' 기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약이 흘러내리거나 얼룩덜룩하게 뭉치는 현상이 발생한다.
  • 가이라기(매화피, 釉방울) 현상: 막사발의 가장 독특한 미학적 특징 중 하나는 굽 주변에 나타나는 '가이라기'이다[5]. 이는 가마의 열량이 다소 부족하여 유약이 완전히 녹지 못하고 오톨도톨하게 맺히거나 균열이 생겨 굳어버린 현상이다[2][9]. 일본의 무사들과 차인들은 이 거친 질감을 칼자루 가죽 장식(가이라기)에 비유하며 깊은 정취를 느꼈다[9].
  • 굽의 구조: 굽은 비교적 높고 튼튼하며 안쪽으로 깊게 파여 있는 형태를 취한다[5][7]. 이는 손으로 쥐었을 때 안정감을 주며, 뜨거운 찻물이 담겼을 때 열전도를 차단하는 실용적 구조를 지닌다.

일본 다도 문화로의 전이와 격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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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평범한 사발이 일본에서 최고의 다도구로 대접받게 된 배경에는 16세기 일본의 사상적·문화적 대전환이 자리하고 있다[2]. 당시 일본 다도는 중국 송나라와 원나라의 화려하고 정교한 청자, 천목다완 등을 숭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무라타 주코에 의해 싹트고 센노 리큐(千利休)에 의해 완성된 와비차(侘び茶)는 인위적인 화려함을 배격하고 소박함과 쓸쓸함 속에 깃든 본질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했다[2].

이러한 선불교적 정신과 결합한 와비차 다도에서 조선의 사발은 완벽한 대안으로 부각되었다[2]. 센노 리큐는 찌그러지고 투박하며 인위적인 기교가 없는 조선 사발에서 무심(無心)과 무기교의 극치를 발견했다[1][10]. 그는 이 사발에 말차를 담고 다선(茶筅)으로 저을 때 일어나는 거품의 조화가 마치 깊은 우물이나 옹달샘을 들여다보는 듯한 숭고한 정취를 준다고 극찬하였다[1][11].

임진왜란 시기 일본 다이묘들은 조선의 사발과 사기장들을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으며, 이 때문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 혹은 '다완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5][10]. 당시 일본 무사들에게 조선의 명품 다완은 영지의 성(城) 하나나 수만 명의 군사와도 바꾸지 않는 최고의 가치재였다[1][8]. 일례로 다이와군의 성주 쓰츠이 준케(筒井順慶)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분노를 사서 처벌받을 위기에 처했을 때, 조선에서 건너온 사발을 바치고 사면받았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2]. 이 사발은 이후 '쓰츠이 이도(筒井筒)'로 불리며 대명물로 남았다.

고려다완의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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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는 한국에서 건너온 이러한 찻사발들을 통칭하여 '고려다완(高麗茶碗)'이라 부르며, 그 특성과 산지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하여 감상한다[2].

대분류 소분류 및 명칭 형태 및 장식적 특징
이도다완 (井戶茶碗) 대이도 (大井戶) 구경이 넓고 굽이 높으며 위엄이 있고, 굽 주변의 가이라기가 매우 뚜렷함[10][13].
소이도 (小井戶) 대이도보다 크기가 작고 단정한 형태를 보이며 굽이 비교적 낮음.
청이도 (靑井戶) 유약의 색조가 푸르스름하거나 회청색을 띠는 종류.
이도와키 (井戶脇) 이도다완의 전형을 갖추었으나 형태가 다소 평평하거나 변형된 종류.
기타 고려다완 도토야다완 (斗斗屋茶碗) 기벽이 얇고 붉은빛 또는 청색의 유약 얼룩이 은은하게 번진 형태[2].
미시마다완 (三島茶碗) 인화문(印花紋) 기법이 정교하게 베풀어진 분청사기 계열의 사발[2].
소바다완 (蕎麦茶碗) 국수 대접과 같이 넉넉한 형태에 거친 질감을 지닌 사발[2].
웅천다완 (熊川茶碗) 경상남도 웅천(창원) 지역에서 생산된 굽이 높은 찻그릇 형태[2].

현대 학계의 재평가와 쟁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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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한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조선 서민들이 개밥그릇이나 막걸릿잔으로 쓰던 막사발을 일본인들이 가져다가 명품 다완으로 숭배했다"는 인식이 정설처럼 받아들여져 왔다[14][15]. 그러나 최근 미술사학계와 도예 연구자들을 중심으로 이러한 '막사발론'에 대한 비판적 재평가와 새로운 학설이 제기되고 있다[15].

잡기론에 대한 비판과 제기론

신한균 사기장을 비롯한 현대 연구자들은 일본 국보로 지정된 '기자에몬 이도(喜左衛門井戶)'를 비롯한 핵심 이도다완들이 결코 함부로 만든 잡기가 아니라고 주장한다[5]. 이들은 해당 사발의 정교한 굽 깎기 방식, 독특한 황색조의 발색, 굽 주변의 유약 뭉침 등이 철저히 통제된 조건 속에서 제작된 '제사용 그릇(제기)'의 형태학적 특징과 일치한다고 분석한다[3][5]. 즉, 민가나 사찰에서 조상을 기리기 위해 정성을 다해 구워낸 수준 높은 제기가 임진왜란을 거치며 흘러 들어간 것이라는 견해이다[3][5].

고유한 찻사발설

조선 시대에도 초기까지는 고려시대의 맥을 이은 말차(가루차) 문화가 상류층과 사찰을 중심으로 잔존하고 있었다[15]. 따라서 이도다완은 우연히 찻잔으로 전용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말차를 마시기 위해 고도의 기술을 바탕으로 특수 제작된 전문 다기였다는 학설도 힘을 얻고 있다[7][15]. 하급 생활용기가 최상류층의 다도 의식으로 전이되는 문화적 현상은 세계 도자사에서 유례를 찾기 어렵기 때문에, 이도다완은 처음부터 미학적 목적과 격조를 품고 제작된 그릇으로 보아야 타당하다는 지적이다[15].

이러한 관점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심어놓은 '조선 공예의 비애미'와 '무심의 잡기론'이 식민사관적 시각에서 조선의 미를 수동적이고 하등한 것으로 왜곡했다는 비판과 맞닿아 있다[3][16]. 조선 도공들은 단순히 솜씨 없이 대충 만든 것이 아니라, 흙의 성질과 불의 흐름을 완전히 꿰뚫어 본 장인정신의 극치로서 자연스러운 조화를 구현해낸 것이라는 해석이 오늘날 설득력을 얻고 있다[5].

현대적 의의와 재현 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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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이후 조선 도공들의 유출과 말차 문화의 쇠퇴로 인해 국내에서 고려다완 및 이도다완의 제작 맥락은 한동안 단절되었다[15]. 일본에서는 이도다완을 모방한 라쿠 다완 등 독자적인 다기들이 발전하였으나, 조선 사발 특유의 태토와 가이라기 질감을 완벽히 재현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10].

20세기 후반에 이르러 한국의 전통 사기장들은 문경, 하동, 진주 등 옛 가마터를 중심으로 막사발의 전통 제법을 복원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본격화하였다[14][17]. 흙을 거르지 않고 거친 상태 그대로 성형하는 태토 배합법, 소나무 장작을 사용하는 전통 망댕이가마의 불 조정 방식, 천연 재료를 활용한 유약 재현 등을 통해 과거 이도다완의 깊이 있는 미감을 되살리는 고증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17]. 오늘날 막사발은 단순한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인공적 화려함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자연과의 동화라는 동양적 미학을 전달하는 소중한 문화적 자산으로 평가받고 있다[8].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신한균, 《우리 사발 이야기》, 미술문화, 2005.
  • 야나기 무네요시, 《조선과 그 예술》, 범우사, 2006.
  • 방병선, 《왕조의 거울 국보 고려다완》, 살림, 2008.
분류: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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