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긍
서긍(徐兢, 1091~1153)은 중국 북송(北宋)의 문신이자 서화가로, 1123년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를 방문한 뒤 저술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을 통해 12세기 고려의 차(茶) 문화와 정교한 다구(茶具) 체계를 집대성하여 기록한 인물이다. 그의 기록은 고려 왕실과 귀족 사회의 음다 풍속뿐만 아니라, 고려청자 다완과 금속제 온기 등 당대 차도구의 실태를 생생하게 입증하는 한국 차 문화사 및 다구 연구의 핵심 사료로 평가받는다.
생애와 고려 사행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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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은 자가 명숙(明叔), 호는 자신거사(自信居士)이며 본래 건주(建州) 구녕(甌寧) 출신이다. 문벌 가문에서 태어나 예문과 고증에 밝았으며, 특히 전서(篆書)와 예서(隸書)를 비롯한 서화 및 고미술 기물 감식에 뛰어난 안목을 지닌 문신이었다. 송 휘종(徽宗) 선화(宣和) 5년인 1123년, 북송 조정은 고려 예종의 붕어를 조문하고 제17대 인종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해 노윤적(路允迪)을 정사로, 부묵경(傅墨卿)을 부사로 삼아 국신사(國信使) 일행을 파견하였다. 이때 서긍은 선박과 의례 물품을 총괄하는 관직인 '제협인선예물관(提轄人船禮物官)'으로 임명되어 사절단에 합류하였다.
서긍 일행은 바닷길을 건너 벽란도(碧瀾渡)를 통해 개경에 입성하였으며, 국빈 숙소인 순천관(順天館)에 머물며 약 한 달 동안 고려의 문물을 시찰하였다. 서긍은 체류 기간 동안 왕실 연회와 외교 접대, 민간의 일상생활, 불교 사원의 의례를 직접 목격하였다. 귀국 후인 1124년, 자신이 관찰한 고려의 정치·군사·풍속·도량형·기물을 글과 그림으로 엮어 40권 300여 조 규모의 《선화봉사고려도경》을 완성하여 송 휘종에게 바쳤다. 원본에 수록되었던 도판은 1127년 정강의 변(靖康之變)의 전란 속에서 대부분 실전되었으나, 문헌 텍스트는 보존되어 12세기 고려의 물질문화를 살피는 독보적인 문헌으로 전해진다.
고려도경에 기록된 다구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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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화봉사고려도경》에서 차 문화와 관련된 핵심 기록은 권30부터 권32에 걸쳐 수록된 「기명(器皿)」 편, 특히 권32의 「다조(茶俎)」와 권31의 「탕호(湯壺)」 조목에 집중되어 있다. 서긍은 고려인들이 차 마시기를 대단히 즐겨 차도구를 매우 정교하게 제작하여 갖추었다고 적었다. 이 기록은 12세기 전반 고려에서 사용된 주요 차도구의 명칭과 재질, 기능적 배치를 실증적으로 전하는 유일한 당대 문헌이다.
주요 다구의 구성과 기능
서긍이 목격하고 정리한 고려의 차도구는 금속기와 도자기, 칠목기, 섬유류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복합적인 도구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 다구 명칭 | 재질 및 형태 | 주요 용도 및 기능 | 문헌상 특징 및 의의 |
|---|---|---|---|
| 금화오잔(金花烏盞) | 흑유 도자기, 금채 장식 | 찻잔 (가루차 음용) | 송나라 건요 흑유잔 양식을 수용한 금채 찻잔 |
| 비색소구(翡色小甌) | 고려청자 | 소형 차배 (찻잔) | 고려 고유의 비색 유약으로 빚어낸 대표적 찻그릇 |
| 은로(銀爐)·탕정(湯鼎) | 은(銀), 세발솥 형태 | 화로 및 찻물 끓임솥 | 중국 귀족 다구 제도를 반영한 고급 금속제 탕수 도구 |
| 은하(銀荷) | 은(銀), 연잎 형태 덮개 | 찻잔 덮개 (보온·위생) | 야외 조타 후 운반 시 차가 식는 것을 막는 덮개 |
| 탕호(湯壺) | 금속 또는 도기, 승반 결합 | 보온용 주전자 (온기) | 점차 시 적정 온도의 물을 공급하는 온수기 |
| 홍조(紅俎)·홍사건(紅紗巾) | 칠목기 및 붉은 비단 | 찻상 및 다구 덮개포 | 관사 등에 다구를 정연하게 진열하는 상차림 도구 |
찻상 차림과 보온 기물
서긍의 기록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은 찻물을 끓이고 보온하는 도구의 발달이다. 탕호(湯壺)는 꽃병과 유사한 몸체에 뚜껑과 승반(받침대)을 갖춘 기물로, 차를 달이거나 물의 온도를 일정하게 유지하는 온기(溫器)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가루차를 풀어 마시는 음다법의 특성상 찻물의 적정 온도를 보존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에 이러한 특수 용기가 발달하였다.
또한 관사나 연회 공간에는 붉은 칠을 한 찻상인 홍조(紅俎)를 놓고 그 위에 각종 다구를 정연하게 배열한 뒤, 먼지나 이물질이 들어가지 않도록 붉은 비단 상보인 홍사건(紅紗巾)으로 덮어두는 위생적·의례적 보관 방식을 취하였다. 야외 뜰에서 찻물을 끓여 들여올 때 찻잔을 덮었던 은하(銀荷) 역시 은으로 제작된 연잎 모양의 덮개로, 이동 중 찻물이 식는 것을 방지함과 동시에 고려 금속공예의 정교한 미감을 반영한다.

고려의 음다 방식과 다례 의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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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이 관찰한 12세기 고려의 차 문화는 송나라의 점차(點茶) 문화를 능동적으로 수용하여 궁중과 귀족 사회의 규범으로 정립한 상태였다.
점차법과 다선의 활용
당시 고려에서는 찻잎을 맷돌인 다마(茶磨)에 곱게 갈아 분말로 만든 뒤, 이를 찻잔에 넣고 끓인 물을 부어가며 다선으로 빠르게 저어 거품을 내는 점차법이 널리 성행하였다. 서긍이 묘사한 비색소구와 금화오잔은 바로 이러한 점차를 담아내기 위한 최적의 형태를 갖춘 기물들이었다. 흰 거품의 유지를 감상하기 위해 흑유 잔이 쓰였으며, 동시에 고려 특유의 푸른 비색 다완이 함께 애용되었다.
연회 진다와 탕음 관습
궁중 연회에서 차를 올리는 진다(進茶) 의식은 매우 엄격한 절차에 따라 진행되었다. 뜰 안에서 탕정으로 물을 끓여 조타한 차를 은하로 덮은 시종들이 일렬로 서서 천천히 걸어 들어왔으며, 의례를 주관하는 찬자(贊者)가 모든 하객에게 찻잔이 두루 돌아갔음을 알릴 때까지는 차를 마실 수 없었다. 서긍은 이처럼 절차가 엄격하고 지체되었기 때문에 대접받은 차가 대부분 식어 있었다는 생생한 체험담을 남기기도 하였다.
한편 연회나 일상 접대에서 차를 세 차례 올린 뒤 반드시 따뜻한 탕(湯)을 내오는 관습이 있었다. 고려인들은 이 탕을 '약(藥)'이라 불렀으며, 손님이 탕을 남김없이 다 마시면 기뻐하고 남기면 자신을 소홀히 대한다고 여겨 불쾌해하였다. 서긍은 사신단이 비록 배가 부르더라도 결례를 범하지 않기 위해 억지로 탕을 마셨다는 일화를 기록하여 고려 특유의 극진한 음다 접대 예법을 전하였다. 이러한 다례는 국가적 행사뿐만 아니라 사찰의 의식과 조상을 기리는 제례, 가문의 대소사인 관혼상제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차의 품종과 풍미에 대한 감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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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은 고려에서 소비되던 차의 품종과 품질에 대해서도 관찰을 남겼다. 그는 고려 토산차와 중국 수입차의 풍미를 비교하여 관능 심평의 관점에서 기술하였다.
- 토산차(土産茶)에 대한 평가: 서긍은 고려 현지에서 생산된 차에 대해 "맛이 쓰고 떫어 입에 넣을 수 없다(味苦澁 不可入口)"고 평하였다. 이는 북송 황실을 중심으로 유행하던 극도로 정제된 고급 제다법에 익숙했던 서긍의 미각적 기준이 반영된 서술이다. 당시 고려 토산차는 인위적인 향료 첨가나 과도한 연마 없이 찻잎 본연의 성분을 살려 가공되었기에 상대적으로 고삽미(苦澁味)가 강하게 느껴졌던 것으로 해석된다.
- 중국산 수입차의 선호: 고려 상류층은 토산차보다 북송에서 들여온 덩이차 형태의 납차(臘茶)와 황실 하사품인 용봉사단(龍鳳賜團) 등의 전차를 지극히 귀하게 여겼다. 황제의 하사품 외에도 무역 상인들을 통해 중국 차가 활발히 유통되면서 귀족 사회의 기호품으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비색청자와 다구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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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의 기록이 차 문화사와 도자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가치를 지니는 지점은 청자, 특히 고려청자의 유색을 '비색(翡色)'으로 명명하고 그 조형미를 국제적으로 증언했다는 점이다.
서긍은 《고려도경》에서 "도기의 빛깔이 푸른 것을 고려인은 비색이라 부르는데, 근래에 기술이 정교해져 그 빛깔이 더욱 좋아졌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중국 당·송대 월주요 등에서 왕실 전용으로 구워내던 '비색(秘色)'과 음은 같으나 한자를 비취빛을 뜻하는 '비(翡)' 자로 표기하여, 고려청자 특유의 맑고 은은한 비취옥빛 유색을 중국 청자와 구별되는 독자적 미감으로 인정한 것이다.
또한 사자 형상이 웅크리고 있는 청자 향로인 '산예출향(狻猊出香)'에 대해 "여러 기물 가운데 가장 정교하고 빼어나다"고 평가하였다. 차를 마시는 공간에 피워두는 향로 역시 다실 문화를 구성하는 핵심 기물로, 당시 고려의 차 생활이 최고급 공예품과 결합된 총체적 문화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음을 서긍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비록 서긍은 고려 다구가 "그윽이 중국의 제도를 본받았다(皆竊效中國制度)"고 적어 송나라 문물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으나, 이는 역설적으로 고려가 선진 다구 문화를 적극 수용하여 독창적인 비색 청자와 섬세한 금속공예 기술로 승화시켰음을 입증하는 물적 증거가 된다.
사료적 가치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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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긍의 기록은 동아시아 차 문화사에서 12세기 전반 고려의 물질문화와 음다 관습을 포괄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1차 사료이다. 국내 문헌인 《고려사》나 문인들의 문집에서는 차도구의 구체적인 형태나 사용 방식, 찻상 차림의 세부 양태가 파편적으로만 등장하는 반면, 서긍은 외부 관찰자의 시선에서 도구의 재질, 명칭, 기능, 배열 방식까지 면밀하게 기록하였다.
비록 중화주의적 시각으로 인해 고려 토산차의 가치를 절하하고 중국 다구의 모방으로 규정한 한계가 존재하지만, 그의 기록은 현대 고고학적 발굴 조사로 출토되는 고려청자 다완과 금속제 탕정, 주전자 등 실물 유물의 용도와 문화사적 맥락을 복원하는 데 결정적인 기준점을 제공하고 있다.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4년
- 조동원 외 옮김, 《선화봉사고려도경》, 아세아문화사, 1999년
- 정인지 외, 《고려사(高麗史)》, 145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