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차
납차(蠟茶 또는 臘茶)는 당·송대에 발달하여 송대 황실 공차(貢茶) 문화의 정점을 이루었던 최고급 고형 긴압단차(緊壓團茶)이자, 섣달이나 이른 봄의 지극히 여린 찻싹을 가공하여 빚어낸 역사적 차를 통칭하는 명칭이다[1][2]. 찻잎을 쪄서 즙을 짜낸 뒤 곱게 갈아 성형하는 정교한 제다법을 거치며, 찻물 위에 뜨는 미세한 거품이 녹은 밀랍과 같거나 찻덩이 표면이 밀랍처럼 윤택하다 하여 납차라 불렸다[1][3].
어원과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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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차라는 명칭은 한자 표기와 해석에 따라 크게 두 가지 맥락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으며, 역대 문헌에서도 '밀랍 랍(蠟)' 자와 '섣달 랍(臘)' 자가 서로 통용되어 쓰였다[1].
첫째는 밀랍의 형상에서 비롯되었다는 설(蠟茶·蠟面茶)이다. 송나라 복건(福建) 건안(建安)의 북원(北苑)에서 생산된 공차를 격불(擊拂)하여 우려내면, 탕수 표면에 하얗고 농밀한 거품이 솟아올라 마치 녹은 밀랍의 기름막이나 유액과 같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3][4]. 남송의 학자 정대창(程大昌)은 《연번로(演繁露)》에서 "건안차를 납차라 부르는 까닭은 찻물 표면에 젖 같은 액체가 뜨는데, 그것이 녹아 흐르는 밀랍을 닮았기 때문에 납면차라 한 것"이라고 밝혔다[3]. 또한 차를 틀에 찍어 건조한 뒤 표면에 향고유(香膏油)를 덧발라 매끄러운 광택을 낸 형태적 특징에서 유래했다는 견해도 있다[1].
둘째는 채엽 시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설(臘茶)이다. 음력 섣달(납월, 臘月) 혹은 동지 뒤의 납일(臘日) 무렵, 혹한을 뚫고 돋아난 아주 미세한 어린 싹을 채취하여 제다했다는 데서 유래한다[5]. 원나라 때의 농학서 《농서(農書)》나 조선의 《동의보감(東醫寶鑑)》, 《부풍향다보(扶風鄕茶譜)》 등에서는 납차를 이른 봄 또는 섣달의 지극히 어린 찻싹(맥과, 작설)으로 빚은 차로 규정하고 있다[1][6]. 실제 북송 황실에 진상되던 공차는 봄 절기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에 극소량 돋아난 차의 생장점을 원료로 삼았다[1][2].
역사적 전개와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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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차의 기원은 당나라 후기의 납면차(蠟面茶)로 거슬러 올라간다[1][3]. 당대 문헌인 《당국사보(唐國史補)》와 오대십국 시대 모문석(毛文錫)의 《다보(茶譜)》에는 복주(福州)와 건안 일대에서 납면차가 명차로 명성을 떨쳤다는 기록이 나타난다[3].
송나라에 이르러 복건 건안의 북원 다원은 관영 공차 생산지로 지정되었으며, 납차는 당대의 단순한 병차(餠茶) 수준을 뛰어넘어 극도로 세밀화된 단차 형태로 진화하였다[7]. 북송 태종 시기 관료 정위(丁謂)가 황실 전용으로 대용봉단(大龍鳳團)을 고안하였고, 이후 인종 대에 채양(蔡襄)이 찻잎의 연한 심만을 모아 더욱 정교하게 빚어낸 소룡단(小龍鳳團)을 바치면서 납차의 제법은 절정에 달했다[1][8]. 휘종 연간에는 은선(銀線)으로 수발을 가려내어 백색의 극치를 이룬 용단승설로 발전하였다[9][10].
원나라 왕정(王禎)은 《농서》 권10 차조(茶條)에서 당·송 이래의 음다 문화를 총괄하며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1].
"차의 쓰임에는 세 가지가 있으니, 잎차인 명차(茗茶), 가루차인 말차(末茶), 그리고 덩이차인 납차(蠟茶)이다. 납차가 가장 귀하고 만드는 법 또한 비범하다. 상등의 여린 싹만을 골라 곱게 갈아 비단 체로 친 뒤 용뇌와 온갖 향고유를 섞어 규격대로 틀에 찍어내는데, 그 모양이 매우 정교하다. 마르면 향유로 윤을 낸다. 이는 오직 황실 공납에만 충당되어 민간에서는 보기 드물었다."[1]
납차는 황제가 최측근 대신이나 종실, 사신에게만 하사하는 최고의 하사품으로 취급받았다[7][10]. 고려를 비롯한 주변국과의 외교에서도 송나라 황제의 권위를 드러내는 핵심 예물로 기능하였다[10].
고려 사회와 납차의 수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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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전기와 중기, 고려 왕실과 문벌 귀족층은 송나라의 선진 다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8][11]. 고려는 자체적으로 뇌원차(腦原茶) 같은 토산 긴압차를 생산하고 있었으나, 외교 사절과 무역 상인을 통해 유입되는 중국의 납차와 용봉단차를 최상급 명차로 선망하였다[8].
1123년(인종 1년) 송나라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徐兢)은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권32 〈다조(茶俎)〉 조목에서 고려의 음차 풍속을 상세히 기록하였다[12].
"고려의 토산차는 맛이 쓰고 떫어 입에 넣기 어렵고, 오직 중국의 납차(臘茶)와 황제가 하사한 용봉사단(龍鳳賜團)을 귀하게 여긴다. 하사품 외에도 상인들이 가져다 팔기 때문에 근래에는 차 마시기를 몹시 좋아하여 다구를 더욱 정비하였다."[8][12]
서긍은 고려인들이 흑유 다완이나 청자 다기를 갖추고 중국식 점다(點茶)를 흉내 내며 납차를 대접하는 연회를 기록하였다[12][13]. 당시 고려 귀족들은 옥빛의 비색 고려청자 잔에 납차를 격불하여 마시는 것을 최고급 풍류로 여겼다[13][14].
조선 시대로 넘어오면서 단차 문화가 쇠퇴하고 잎차 문화가 자리잡았으나, 의학 문헌과 다서에서는 납차의 개념이 지속적으로 언급되었다[6][7]. 허준의 《동의보감》 〈탕액편(湯液篇)〉에서는 차나무의 약성을 설명하며 "옛사람들은 싹이 돋아난 아주 어린잎을 작설이나 맥과라 하였는데, 납다(臘茶)가 곧 이것이다. 여린 잎을 짓찧어 떡을 만들어 불에 굽는다"라고 서술하여, 가장 이른 시기에 돋아난 극상품 약재이자 차로서 납차를 규정하였다[6].
제조 공정과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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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북원에서 확립된 납차의 제다법은 찻잎 본래의 떫고 쓴맛을 기술적으로 제어하고 순백색의 거품을 극대화하기 위해 극도의 가공 정밀성을 요구하였다[7]. 조여려(趙汝礪)의 《북원별록(北苑別錄)》과 송나라 다서들에 기록된 납차의 제조 단계는 고도의 물리적 착즙과 분쇄 공정으로 이루어졌다.

- 채엽 및 선별: 해가 뜨기 전 이른 새벽에 이슬을 머금은 찻싹만을 딴다. 채취한 싹 중에서도 겉잎을 떼어내고 오직 중심부의 미세한 싹맥(수발)만을 가려내는 엄격한 감별을 거쳤다.
- 증청 및 냉각: 찻잎을 시루에 쪄서 산화효소 활성을 즉시 정지시킨 뒤, 찬물에 여러 차례 헹구어 급속 냉각시킨다.
- 압착(착차): 쪄낸 찻잎을 천으로 싸고 대나무 껍질로 묶은 뒤, 소착(小榨)과 대착(大榨)이라 불리는 강력한 지렛대 압착 장치에 넣어 밤새 눌렀다. 이를 통해 차 안에 포함된 수분과 진액(차고, 茶膏)을 완전히 짜냈다. 이는 찻잎 특유의 떫은맛과 풋내를 인위적으로 빼내기 위한 송대 특유의 기법이었다.
- 연다(연마): 즙을 뺀 차 덩어리를 도자기 사발이나 돌절구에 넣고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며칠에 걸쳐 곱게 갈아 진흙 같은 유제(乳劑) 상태로 만들었다. 입자가 미세할수록 격불했을 때 백색 거품이 잘 일어났다.
- 성형 및 배건: 미세하게 갈린 반죽에 용뇌(龍腦)와 같은 귀한 천연 향료와 향고유를 혼합한 후, 용이나 봉황 문양이 정교하게 새겨진 금속 틀(과, 銙)에 채워 단단하게 압축 성형하였다[1].
- 건조 및 표면 도포: 성형된 차를 화로에 얹어 극히 미세한 온도로 장기간 건조하였다. 건조가 끝난 뒤 표면에 향고유를 덧발라 밀랍과 같은 매끄러운 유광을 입혔다[1].
제다 및 음용 특성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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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대 납차는 당대 육우(陸羽)가 정립한 전통 병차나 명대 이후 보편화된 산차(잎차)와 제조 목적 및 소비 형태에서 명확한 차이를 보였다[7].
| 구분 | 당대 병차(餠茶) | 송대 납차(蠟茶/團茶)[7] | 명·청대 산차(散茶/葉茶)[7] |
|---|---|---|---|
| 원료 형태 | 찻잎 전체(일아이엽 등)[6] | 극도로 어린 싹의 중심부(수발)[1][6] | 성숙한 찻잎 및 싹[6] |
| 탈즙 공정 | 없음 (원형 그대로 찧음) | 고압 착즙으로 차의 즙과 기름을 배출 | 없음 |
| 가향 여부 | 원칙적 무가향(순수 찻잎) | 용뇌 등 고급 향약과 향고유 배합[1] | 화차(花茶) 외 원칙적 무가향 |
| 음용 방식 | 전차법(솥에 물을 끓이며 가루를 넣고 달임) | 점다법(찻사발에 가루를 넣고 다선으로 격불) | 포차법(다호에 잎차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우림) |
| 지향한 수색 | 맑은 녹색 또는 황색 | 순백색에 가까운 농밀한 유포(거품)[3][4] | 황록색, 홍색, 등황색 등 맑은 탕색[5] |
| 주요 다기 | 청자완, 토기 솥 | 흑유 천목다완, 청자 잔[13][15] | 자사호, 백자 배 |
음다 문화와 격불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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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에서 납차를 음용하는 과정은 '점다(點茶)'와 '투다(鬪茶)'라는 고도의 유희적 의식으로 구현되었다.
단단하게 굳은 납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먼저 차칼로 찻덩이를 쪼갠 뒤, 종이로 싸서 두드려 부수고, 숯불에 살짝 쬐어 수분을 날린 다음, 연차(碾茶) 맷돌로 갈아 비단 체로 쳐서 고운 가루를 얻어야 했다[1]. 이 가루를 예열된 찻사발(완, 盞)에 담고 끓는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대나무 다선으로 격렬하게 휘저어 거품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생겨나는 거품의 색과 지속력이 감상의 핵심이었다. 찻잎의 진액을 짜내고 극도로 곱게 분쇄한 납차는 격불 시 눈처럼 하얗고 촘촘한 백색 유포를 형성하였다. 다인들은 이 흰 거품이 찻잔 가장자리에 물자국을 남기지 않고 얼마나 오래 버티는가를 두고 승부를 겨루었으며, 이를 투다라 불렀다. 백색 거품을 가장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북송 황실과 사대부들은 안쪽이 칠흑처럼 검은 복건 건요(建窯)의 흑유 다완(토호전, 유적천목 등)을 으뜸으로 쳤다.
소멸과 역사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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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롭고 정교한 극치를 달렸던 납차 문화는 14세기 후반 명나라의 건국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1391년(홍무 24년), 명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차를 만드는 백성들의 노고가 지나치게 극심하고 폐해가 크다는 이유로 북원의 대소 용봉단차 제조를 전면 금지하는 영을 내렸다. 대신 찻잎 본래의 잎 모양을 보존하여 덖거나 말리는 산차만을 공납하도록 명하였다.
이 조치로 인해 수백 년간 동아시아 상류층의 미의식을 지배했던 납차와 긴압단차, 점다법의 전통은 급격히 쇠퇴하였고, 찻잎을 다호에 넣어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 마시는 포차법(泡茶法)이 차 문화의 새로운 표준으로 확립되었다.
비록 납차는 차의 천연적인 풍미와 성분을 압착하여 짜내고 인공적인 향유를 첨가했다는 점에서 훗날 문인들로부터 차의 진정한 본성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으나, 당·송대 공예 기술과 황실 미학이 집약된 결정체로서 동아시아 다도사에서 독보적인 위상을 지닌 역사적 유산이다[7].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조여려, 《북원별록(北苑別錄)》, 1186년.
- 서긍,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4년.
- 왕정, 《농서(農書)》, 1313년.
- 허준, 《동의보감(東醫寶鑑)》, 1613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