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원
북원(北苑)은 중국 오대십국(五代十國) 시기부터 송대(宋代)에 걸쳐 복건성(福建省) 건안(建安, 현 건구시) 봉황산(鳳凰山) 일대에 조성되었던 관영 어다원(御茶園)이자, 이곳에서 생산되어 황실에 진상되던 최고급 공차(貢茶)를 통칭하는 명칭이다. 찻잎을 찌고 즙을 짜낸 뒤 곱게 갈아 틀에 찍어내는 연고단차(硏膏團茶)의 극치를 보여주며, 표면에 용과 봉황 문양을 새긴 용봉단차(龍鳳團茶)를 중심으로 송나라 궁중 다도와 점다·투다 문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역사와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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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원차의 역사는 당나라 말기 민간 차 재배지에서 출발하여 오대십국 시기 관영 체제로 편입되면서 본격화되었다. 민국(閩國)의 장정휘(張廷暉)가 봉황산 일대의 사유 다원을 통치자에게 헌납하였고, 이 다원이 북원(北苑)이라 명명되면서 관영 어다원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이후 남당(南唐)을 거쳐 송나라 태종(太宗) 대인 977년(태평흥국 2년) 관리를 파견하고 전용 제다 시설인 용배(龍焙)를 건립하면서 황실 전용 어용 다원으로 확립되었다.
북송 시기 북원은 관료들의 치열한 헌상 경쟁과 황실의 후원 속에 전성기를 누렸다. 진종(眞宗) 대 복건전운사 정위(丁謂)가 찻잎 표면에 용과 봉황의 문양을 압인한 대용봉단(大龍鳳團)을 창안하여 진상 체계를 확립했다. 인종(仁宗) 대에는 명신이자 서예가인 채양(蔡襄)이 더욱 정밀하고 작은 규격의 소용단(小龍團)을 개발하여 명성을 떨쳤다. 송 휘종(徽宗)은 스스로 차에 관한 명저인 『대관다론(大觀茶論)』을 저술할 정도로 북원차를 극진히 아꼈으며, 이 시기 정가학(鄭可學)이 찻잎의 어린 심지만 골라 만든 용단승설(龍團勝雪)을 바치며 제다 기법은 정점에 달했다.
원나라 시기에도 어다원 체제는 유지되었으나, 1391년 명나라 태조 주원장(朱元璋)이 백성의 노고를 줄인다는 명목으로 정교한 단차 제조를 금지하는 파조단차(罷造團茶) 칙령을 반포하면서 급격한 전환을 맞이했다. 이로써 수백 년간 이어지던 북원의 연고단차 생산은 중단되었고, 차 문화의 중심은 잎을 그대로 우려 마시는 엽차이자 산차(散茶)인 용정차나 무이산 일대의 암차 등으로 이동하게 되었다.
북원 공차의 주요 종류와 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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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원에서 제조된 공차는 시기별로 형태와 크기, 원료의 선별 기준에 따라 지속적으로 개량되었다. 초기에는 비교적 묵직한 덩어리 형태였으나 점차 작고 정교한 고급품으로 발전하였다.
| 명칭 | 창안 시기 및 인물 | 규격 및 형태 | 원료 및 주요 특징 |
|---|---|---|---|
| 대용봉단(大龍鳳團) | 북송 진종 연간, 정위 | 1근(斤)당 8개 (약 60~75g/개) | 용과 봉황 무늬를 각각 새긴 원형 단차, 초기 북원 공차의 표준 |
| 소용단(小龍團) | 북송 인종 연간, 채양 | 1근당 20개 (약 25~30g/개) | 정교한 소형 틀에 금빛 광택 처리, "황금보다 구하기 어렵다"고 평가받음 |
| 밀운용(密雲龍) | 북송 신종 연간, 가우 | 소용단과 유사한 소형 원형 | 짙은 구름 속 용 문양, 노란 비단 두 겹으로 봉인하여 극소수 근신에게만 하사 |
| 용단승설(龍團勝雪) | 북송 휘종 선화 연간, 정가학 | 초소형 단차, 백색 표면 | 찻잎 싹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중심부 은선(銀線)만 모아 가공한 극상품 |
| 어용 백차(御用白茶) | 북송 휘종 연간 | 원형 또는 방형 판형 | 차나무 변이종인 백차 싹을 채취하여 찌고 건조한 휘종의 애호품 |
북원의 원료 선별은 싹의 생육 상태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었다. 곡우 전 가장 먼저 돋아난 미세한 싹인 곡아(穀芽), 싹 하나에 잎 하나가 갓 펼쳐진 일창일기(一槍一旗)의 백아(白芽)가 최상급 원료로 쓰였다. 이러한 싹을 맑은 물에 띄워 중심부의 흰 섬유질인 은선만 발라내 제다하는 기술은 북원 공차만의 독보적인 기준이었다.
제다 공정과 연고법의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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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원차는 찻잎의 본래 형태를 보존하는 일반 덖음차나 전차와 달리, 찻잎의 쓴 즙을 완전히 짜내고 극도로 미세하게 갈아 응고시키는 연고법(硏膏法)을 취했다. 송대 조여려(趙汝礪)의 『북원별록(北苑別錄)』과 웅번(熊蕃)의 『선화북원공차록(宣和北苑貢茶錄)』에 기록된 공정은 고도의 노동 집약적 체계를 띤다.

- 채차(採茶): 이른 봄 청명 전후, 해가 뜨기 전 새벽(오경)에 이슬을 머금은 상태에서 채취했다. 체온이 어린 싹에 닿아 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손가락 끝 살이 아닌 손톱으로 끊어내는 방식을 엄수했다.
- 선다(揀茶) 및 증다(蒸茶): 채취한 싹을 즉시 깨끗한 샘물에 띄워 등급별로 가려낸 뒤, 가마솥에 맑은 물을 끓여 발생하는 순수한 증기로 균일하게 쪄 익혔다.
- 착차(搾茶): 찐 찻잎을 찬물로 헹구어 식힌 다음, 베 주머니에 넣고 대형 목재 압착 장치로 눌러 즙을 짜냈다. 첫날 밤에는 가볍게 눌러 풋내를 빼고, 이튿날 강하게 압착하여 찻잎 내 떫고 쓴 진액(차고, 茶膏)을 완전히 배출시켰다.
- 연다(硏茶): 즙이 빠져나간 섬유질 찻잎을 도자기 유발이나 돌 맷돌에 넣고 맑은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갈았다. 최상급 차는 온종일 수십 차례 이상 갈아 입자가 완전히 풀려 매끄러운 풀이나 연고(膏) 상태가 되도록 만들었다.
- 조차(造茶): 죽이나 풀처럼 된 차 반죽을 정교하게 조각된 금·은·철제 틀(규형, 規形)에 채워 넣고 단단히 눌러 문양을 찍어냈다.
- 과황(過黃) 및 배건(焙乾): 성형된 단차를 끓는 물에 살짝 담갔다 건지는 과황 과정을 거쳐 표면에 윤기를 입힌 뒤, 숯불 화로 위에 걸어 약한 불로 수일에서 보름에 걸쳐 서서히 수분을 건조시켰다.
음다 의례와 투다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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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원에서 생산된 정교한 단차는 당대의 독특한 음다 방식인 점다와 이를 겨루는 유희인 투다(鬪茶)의 모태가 되었다. 덩어리진 단차를 마시기 위해서는 복잡한 도구와 절차가 수반되었다.
단차를 붉은 비단에 싸서 쪼갠 뒤 작은 찻덩이를 맷돌(다마, 茶磨)이나 약틀에 넣어 곱게 갈고, 고운 체(다라, 茶羅)로 걸러 밀가루처럼 부드러운 분말을 얻었다. 이 가루차를 찻사발에 넣고 끓인 물을 조금씩 부어가며 대나무를 잘게 쪼개어 만든 다선으로 빠르게 저어 풍성한 백색 거품을 일으켰다. 송대 문인들은 물을 일곱 번에 나누어 부으며 거품을 일으키는 칠탕법(七湯法)을 정립하여 점다의 완성도를 높였다.
거품의 빛깔과 지속력은 곧 차의 품격을 가늠하는 척도였다. 찻잎의 겉껍질을 벗겨내고 즙을 짜낸 북원차로 점다를 행하면 순백색 거품(탕화, 湯花)이 사발 가득 피어올랐다. 이 흰 거품을 가장 선명하게 감상하기 위해 흑갈색 유약을 입힌 복건성 건요(建窯)의 천목다완(흑유완)이 널리 쓰였다. 찻사발 벽에 거품이 가라앉으며 생기는 물자국(수흔, 水痕)이 늦게 나타나는 쪽이 승리하는 투다가 황실과 사대부 사이에서 대유행했으며, 최고의 차에 어울리는 명천(名泉)을 확보하기 위해 강소성 무석의 혜산천 물을 길어와 북원차를 우리는 풍조가 형성되기도 했다.
이화학적 특성과 풍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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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원 연고단차의 독특한 향미와 외관은 착즙과 반복 분쇄라는 극단적 가공 공정에서 비롯되었다. 일반적인 녹차가 카테킨류를 온전히 보존하여 청량한 떫은맛과 쌉쌀한 맛을 유지하는 것과 달리, 북원차는 착즙 단계에서 수용성 폴리페놀 성분이 대거 압출되었다.
차의 떫은맛을 주도하는 주화학 성분인 에피갈로카테킨 갈레이트(EGCG, C22H18O11)를 비롯한 유리형 카테킨류가 즙과 함께 배출되면서, 탕수의 떫은맛과 자극성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반면 세포벽이 완전히 파쇄되는 고강도 분쇄 과정을 거치며 수용성 펙틴, 식물성 다당류, 엽록소 복합체가 미세 유화액을 형성했다. 여기에 어린 싹 특유의 유리아미노산인 테아닌 성분이 상대적으로 보존되어, 차탕은 떫지 않고 매끄러우며 은은한 감칠맛과 단맛을 띠었다.
미세하게 분쇄된 불용성 분말 입자와 계면활성 능력을 가진 단백질 성분이 다선의 강한 교반력과 결합하면서 생성된 거품은 크림처럼 농밀하고 안정적인 구조를 형성했다. 찻잎의 표면 솜털인 백호와 은선 중심의 원료를 사용하여 우려낸 거품의 색상은 푸른 기가 거의 없는 순백색에 가까웠다. 한편 전통 의학 문헌에서는 이러한 연고단차가 열을 내리고 정신을 맑게 하며 답답한 기운을 풀어주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차의 성분을 지나치게 제거하여 본래의 자연스러운 기운을 훼손했다는 소동파(蘇東坡) 등 일부 문인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대외 교류와 한반도 차 문화에 미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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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황실의 보물이었던 북원 공차는 외교 사절을 위한 하사품이나 무역품으로 주변국에 전해지며 동아시아 차 문화 교류의 정점에 섰다. 고려 왕실과 귀족 사회 역시 송나라로부터 용봉단차를 하사받아 최고의 사치품이자 의례용 음료로 귀하게 여겼다.
1123년(고려 인종 1년) 송나라 사신으로 고려를 방문한 서긍은 견문록인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권32 「다조(茶俎)」 조에서 당시 고려의 음다 실태를 구체적으로 증언했다. 서긍은 고려의 토산 차는 맛이 쓰고 떫어 입에 맞지 않아, 오직 중국의 납차(臘茶)와 송나라 황제가 하사한 용봉사단(龍鳳賜團)을 귀하게 여겼으며 상인을 통해서도 이를 구해 마셨다고 기록했다. 이는 북원에서 생산된 용봉단차가 고려 지식인과 왕실 사이에서 최고의 차로 인식되었음을 입증한다.
고려인들은 북원 공차의 수입과 더불어 송나라의 점다 방식을 전면 수용했다. 차를 가루 내어 거품을 내어 마시는 풍습이 정착하면서, 중국의 건요 흑유완을 수입해 사용하는 한편 고려의 독창적인 비색 순청자 다완을 제작하여 격조 높은 다회를 열었다. 고려 명종 대의 문인 이규보(李奎報)와 이제현(李齊賢)의 시문에도 송나라 황실의 용봉단차를 선물 받고 감탄하며 마신 기록이 빈번히 등장한다. 비록 명대 이후 단차가 소멸하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 산차 중심의 음다 풍토가 자리 잡았으나, 북원차가 확립한 엄격한 제다 기준과 다도 의례는 한국 전통 차 문화사에서 이상적인 차의 전형으로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송 휘종(趙佶), 《대관다론(大觀茶論)》, 1107년.
- 조여려(趙汝礪), 《북원별록(北苑別錄)》, 1186년.
- 채양(蔡襄), 《다록(茶錄)》, 1064년경.
- 서긍(徐兢),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 1124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