엽록소
엽록소(葉綠素, chlorophyll)는 차나무(Camellia sinensis) 잎에서 빛 에너지를 흡수하여 광합성을 수행하는 지용성 포르피린계 색소이자, 건조 찻잎의 외형, 우려낸 탕색(湯色), 찻잎 찌꺼기인 엽저(葉底)의 색채 품질을 결정짓는 핵심 화합물이다[1]. 찻잎에는 주로 청록색을 띠는 엽록소 a와 황록색을 띠는 엽록소 b가 약 2:1에서 3:1의 비율로 존재하며, 차의 재배 방식과 제다(製茶) 공정 중 열, 효소, 산성 환경에 의해 다양한 분해 산물로 전환되어 차의 고유한 시각적 특징을 형성한다.
화학적 구조와 물리화학적 특성
편집
찻잎의 엽록소 분자는 포르피린 핵의 중심에 마그네슘 이온(Mg2+)이 결합된 친수성 포르피린 고리(porphyrin ring)와 기다란 친유성 피톨(phytol) 사슬이 에스테르 결합으로 이어진 구조를 지닌다. 찻잎 속 엽록소의 대부분은 엽록소 a(C55H72O5N4Mg)와 엽록소 b(C55H70O6N4Mg)로 구성된다.
- 엽록소 a: 화학 구조의 제7 탄소 위치에 메틸기(-CH3)를 보유하고 있으며, 청록색을 나타내고 붉은색 파장(약 660 nm 부근)과 청색 파장(약 430 nm 부근)의 빛을 강하게 흡수한다.
- 엽록소 b: 제7 탄소 위치에 포르밀기(-CHO)를 보유하고 있어 황록색을 나타내며, 약 450 nm와 640 nm 부근의 광선을 흡수한다.
엽록소 분자는 매우 불안정하여 빛, 산소, 열, 유기산, 효소의 작용에 의해 쉽게 변형된다. 특히 중심 금속인 마그네슘 이온은 산성 조건이나 고온에 노출될 때 두 개의 수소 이온(H+)으로 치환되기 쉬운데, 이로 인해 올리브 갈색 내지 암갈색을 띠는 페오피틴(pheophytin)으로 전환된다[2][3]. 또한 피톨 사슬이 효소나 화학 반응에 의해 가수분해되면 수용성 성질을 띠는 클로로필라이드(chlorophyllide)로 변화한다[4].
차나무 재배 환경과 엽록소 발현
편집
찻잎 내 엽록소 함량은 차나무 품종, 일조 조건, 찻잎의 성숙도, 시비 관리에 따라 큰 편차를 보인다. 일반적으로 어린 새싹보다는 완전히 전개된 성엽(成葉)에서 절대적인 엽록소 함량이 높으나, 차의 품질 면에서는 잎 조직 내 엽록소와 아미노산, 카테킨의 균형이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
차 재배에서 엽록소 함량을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대표적인 기법은 차광(遮光) 재배이다. 찻잎 수확 전 23주 동안 짚이나 한랭사 등으로 햇빛을 8598% 차단하면, 식물체는 부족한 광량을 보상하기 위해 엽록소, 특히 청색 파장의 빛을 흡수하는 엽록소 b의 합성을 촉진한다. 이 과정에서 엽록소 a/b 비율이 감소하고 잎 전체의 총엽록소 농도가 비차광 찻잎에 비해 급격히 증가하여 짙은 암록색을 띠게 된다. 동시에 카테킨으로의 전환이 억제되어 감칠맛을 내는 테아닌의 농도가 높게 유지된다[2]. 이러한 원리는 고급 센차나 옥로(玉露), 말차(抹茶)용 원료인 텐차(碾茶)의 생산에 핵심적으로 응용된다.
제다 공정 중 엽록소의 화학적 변화
편집
제다 과정은 엽록소의 보존 또는 통제된 분해를 통해 목표하는 차의 색과 향미를 완성하는 일련의 화학 공정이다. 비산화차인 녹차부터 완전 산화차인 홍차에 이르기까지 엽록소의 변화 경로는 상이하게 전개된다.

관련 항목: 살청
살청(Fixation)과 급랭
녹차 제조 시 수행되는 살청은 고온의 열을 가해 산화 효소의 활성을 차단함으로써 찻잎 본연의 녹색을 유지하는 공정이다. 그러나 열처리 과정 자체에서도 엽록소의 탈마그네슘화 반응이 발생하여 일부 엽록소가 페오피틴으로 변한다[3].
- 증제 살청: 은시옥로나 일본의 센차처럼 고온의 수증기로 찌는 방식은 효소 불활성화가 신속하고 열 노출 시간이 짧아 엽록소 파괴가 적으며, 선명한 초록빛을 보존하기 유리하다.
- 초청 살청: 솥에서 덖는 방식은 전도열을 이용하므로 찻잎 내부 온도가 올라가는 동안 엽록소가 열과 유기산에 노출되어 페오피틴 a 및 b의 생성 비율이 상대적으로 높아지며, 그 결과 은은한 황록색 또는 비취색을 띠게 된다. 살청 직후 신속하게 찻잎을 펼쳐 열을 식히는 풍랭(風冷) 작업을 거치지 않으면 잔류 열과 수분으로 인해 엽록소가 급속도로 분해되어 잎이 누렇게 변색된다.
유념과 산화(발효)
유념(비비기) 공정에서는 세포 조직이 파괴되며 엽록소가 엽록체 밖으로 노출되고, 세포액에 존재하는 식물성 유기산과 접촉하게 된다. 홍차의 발효 공정에서는 엽록소분해효소(chlorophyllase)의 작용으로 피톨기가 분리되어 클로로필라이드가 생기며, 산성 환경 하에서 마그네슘이 탈락하여 페오피틴과 페오포바이드(pheophorbide)로 전환된다[4]. 이 분해 산물들은 카테킨의 효소적 산화 생성물인 테아플라빈, 테아루비긴 및 단백질 복합체와 상호작용하여 마른 홍찻잎 특유의 흑갈색(Black tea) 외관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다[2][5]. 부분 산화차인 우롱차(청차)에서는 주청(做靑) 과정을 통해 잎 가장자리 세포만 선택적으로 산화시켜 엽록소를 분해함으로써 '녹엽홍양변(綠葉紅鑲邊, 푸른 잎 가장자리에 붉은 테가 둘러짐)'이라는 시각적 특징을 유도한다.
건조와 열처리
건조 및 배화(焙火) 공정의 고온 조건에서는 잔존 엽록소가 피로페오피틴(pyropheophytin) 등으로 추가 열분해된다. 차를 장기간 보관할 때 빛, 수분, 산소에 노출되면 잔류 엽록소가 지속적으로 산화되어 마른 잎의 색상이 탁해지고 찻물 색이 붉고 칙칙해지는 품질 퇴화(진화 현상)가 일어난다.
차 분류별 엽록소 거동 비교
편집
찻잎의 가공 방법과 발효도에 따라 완제품 내 엽록소의 잔존율 및 주요 색소 구성은 크게 달라진다.
| 차 종류 | 대표 가공 특성 | 주 잔존 색소 상태 | 건엽 및 탕색 특징 |
|---|---|---|---|
| 녹차 | 무산화, 고온 살청 | 엽록소 a·b 고농도 잔존, 소량의 페오피틴 | 선명한 녹색~황록색 외관 및 탕색[6][7] |
| 백차 | 위조 후 약한 건조, 무살청 | 천연 엽록소 부분 보존 및 페오피틴화 | 잎 표면 백호와 함께 은록색~회록색 |
| 청차(우롱차) | 부분 산화, 주청 및 홍배 | 엽록소와 페오피틴, 카테킨 중합물 공존 | 황녹색 중심부와 갈색 가장자리, 등황색 탕색 |
| 홍차 | 완전 산화, 효소적 갈변 | 엽록소 대다수가 페오피틴·페오포바이드로 전환[5][8] | 흑갈색 외관, 붉고 밝은 등홍색 탕색[2] |
| 흑차(보이숙차 등) | 미생물 후발효, 악퇴 | 고온다습 조건에서 엽록소 전량에 가깝게 파괴 | 흑갈색~흑색 외관, 짙은 갈홍색 탕색 |
차 품질 평가에서의 시각적 지표
편집
엽록소와 그 유도체의 정량적 비율은 차의 관능검사 및 과학적 등급 판정에 널리 활용된다. 녹차의 경우, 엽록소 a와 b의 보존율이 높고 페오피틴으로의 전환율이 낮을수록 신선하고 우수한 품질로 평가받는다[6]. 찻물에 녹아 나오는 색소 중 플라보놀 배당체와 미세 분산된 엽록소 유도체의 비율은 투명도와 밝기에 영향을 준다. 특히 분말 형태로 찻잎 전체를 섭취하는 말차의 경우, 엽록소 함량은 시각적 신선도와 시장 가격을 결정하는 일차적인 기준이다. 반면 홍차에서는 엽록소가 페오피틴과 피로페오피틴으로 온전히 전환되어 카테킨 산화물과 조화를 이루어야 균일한 암갈색의 외형 품질을 인정받는다.
생리활성 연구
편집
찻잎에 함유된 엽록소는 기호성을 부여하는 색소 기능 외에도 다양한 생리활성 잠재력을 지닌 물질로 연구되고 있다. 분자 구조 내 포르피린 고리가 다양한 유기 화합물과 평면적 결합을 형성할 수 있어, 체내 유해 라디칼을 포획하는 항산화 보조 작용이나 소화기계 내 특정 유해 물질의 흡수를 저감시키는 데 기여할 수 있다는 실험실 연구가 보고되어 있다[3]. 또한 수용성 유도체인 클로로필린(chlorophyllin) 형태의 연구에서는 세포 보호 및 장내 환경 개선과의 연관성이 다각도로 탐색되고 있으나, 일반적인 침출차 음용 시에는 엽록소의 지용성 특성으로 인해 탕액으로의 용출량이 제한적이므로 주로 말차처럼 찻잎 전초를 분말화하여 섭취할 때 엽록소 자체의 체내 흡수율이 유의미해지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Harold N. Graham, 'Green tea composition, consumption, and polyphenol chemistry', Preventive Medicine, 1992.
- Chen Zongmao, 《중국다경(中國茶經)》, 상해문화출판사, 1992.
- P. K. Mahanta, 'Colour of Black Tea', Tea: Cultivation to consumption, Chapman & Hall, 199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