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화
산화(Oxidation)는 찻잎에 내재된 폴리페놀 산화효소(Polyphenol oxidase)가 공기 중의 산소와 반응하여 찻잎의 주요 성분과 색상을 화학적으로 변화시키는 기작이다[1]. 잎을 채취한 후 가공하는 제다(製茶) 과정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계 중 하나로, 이 산화 과정의 진행 정도에 따라 차의 향미, 찻물의 색, 그리고 차의 종류가 최종적으로 결정된다[2].
차의 산화와 발효의 구분
편집
차의 역사와 산업 현장에서는 오랫동안 관습적으로 찻잎의 산화 과정을 '발효'라고 칭해왔다. 이로 인해 산화가 일어나지 않은 녹차를 '비발효차', 일정 부분 진행된 우롱차를 '반발효차', 완전히 진행된 홍차를 '완전발효차'로 부르는 분류 체계가 널리 정착되었다[1].
그러나 과학적 관점에서 차의 산화와 발효는 명확히 다른 개념이다. 발효는 효모나 유산균과 같은 미생물의 대사 작용을 통해 유기물이 분해 및 변화하는 과정이다. 반면 일반적인 차의 '발효' 공정은 미생물의 개입 없이 찻잎 자체의 효소와 산소의 결합만으로 이루어지는 효소적 갈변 현상, 즉 산화(Oxidation)이다[3]. 미생물이 실제로 관여하는 발효 과정은 찻잎을 두껍게 쌓아 습열을 가하는 보이차 등 흑차류의 '후발효' 공정이나 콤부차 같은 특수 차류에 국한되며, 녹차, 청차(우롱차), 홍차 등 일반적인 육대다류의 성격을 가르는 주된 원리는 산화 작용이다[4].
산화 과정의 화학적 원리
편집
산화는 찻잎이 나무에서 채취된 직후부터 수분이 증발함에 따라 서서히 자연적으로 시작되며, 제다 공정에서의 물리적 개입을 통해 폭발적으로 촉진되거나 인위적으로 억제된다. 찻잎 속에는 다량의 폴리페놀(주로 카테킨)과 이를 산화시키는 폴리페놀 산화효소가 존재하는데, 살아있는 찻잎 상태에서는 세포벽 등 조직에 의해 서로 분리되어 있다[1]. 그러나 찻잎이 시들고 물리적인 힘에 의해 세포 조직이 파괴되면, 이 두 물질이 섞이면서 공기 중의 산소와 만나 산화중합반응을 일으킨다[1].
산화가 진행되는 동안 찻잎 내부에서는 극적인 화학적 연쇄 변화가 일어난다. 우선 엽록소(Chlorophyll)가 분해되며 녹색이 옅어지고 점차 황색, 적색, 갈색으로 색상이 변한다[5]. 동시에 카테킨은 산화 효소에 의해 더 크고 복잡한 분자 구조를 가진 색소 화합물로 중합된다[5]. 산화 초기 단계에서는 밝은 오렌지색이나 황금빛을 띠는 테아플라빈(Theaflavin)이 주로 생성되며, 산화가 더 깊숙이 진행됨에 따라 이 분자들이 결합하여 진홍색 및 적갈색을 띠는 테아루비긴(Thearubigin)으로 변모한다[2].
이러한 화학적 변화는 찻잎 본연의 풋내를 없애는 동시에, 타닌 특유의 강한 떫고 쓴맛을 부드럽게 완화한다[6]. 또한 화학 반응의 부산물로 다양한 방향성 물질이 방출되어 차에 화려한 꽃향, 과일향, 맥아향과 진하고 묵직한 바디감을 부여하게 된다[2].
제다 공정에서의 산화 통제 기법
편집
차를 만드는 과정에서 산화를 시작시키고, 가속하고, 원하는 시점에서 멈추는 것은 치밀한 통제 아래 이루어진다. 산화를 조절하는 핵심 제다 공정은 다음과 같다.
- 위조(萎凋, 시들이기): 채엽한 생엽을 통풍이 잘되는 곳에 널어두어 찻잎의 수분 함량을 서서히 줄이는 단계다[1]. 세포 조직이 부드러워져 다음 공정에서 잎이 부서지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세포벽 내의 수분이 줄어들면서 산화 효소와 카테킨이 서서히 활성화될 준비를 갖추게 한다[1].
- 유념(揉捻, 비비기) 및 주청(做靑): 찻잎에 강한 물리력을 가하는 공정이다. 유념은 찻잎을 멍석이나 기계에 넣고 강하게 비비는 과정이며, 주청은 찻잎을 채반에 놓고 흔들어 잎끼리 부딪치게 해 상처를 내는 과정이다[7],[8]. 이를 통해 찻잎 표면과 내부 세포벽이 파괴되고 내부의 즙이 밖으로 배어 나오며, 효소와 폴리페놀, 공기 중의 산소가 한꺼번에 섞여 본격적이고 급격한 산화가 일어난다[8].
- 살청(殺靑, 열처리): 가마솥의 고온에 덖거나(초청), 뜨거운 수증기를 쐬어(증청) 찻잎에 강력한 열을 가하는 공정이다[7]. 산화를 주도하는 폴리페놀 산화효소는 고온에 노출되면 활성을 잃고 파괴된다[9]. 살청을 거치고 나면 그 시점부터 차의 산화는 영구적으로 멈추며 향미가 고정된다[3]. 녹차는 채엽 직후 즉시 살청하여 산화를 원천 차단하고, 청차는 원하는 향미가 도달했을 때 중간에 살청을 진행한다[3],[8].
산화도에 따른 차의 분류
편집
차는 산화효소의 활성을 억제하는 살청의 시점, 즉 최종 산화 정도에 따라 그 종류가 결정된다.
| 분류 | 산화 정도 | 특징 및 제조 원리 | 대표 차류 |
|---|---|---|---|
| 비산화차 | 10% 이내 | 찻잎을 딴 직후 가장 먼저 고온으로 살청하여 산화효소를 파괴한 차다. 찻잎 본연의 녹색과 엽록소가 유지되며, 풋풋한 향과 산뜻한 맛이 특징이다[7]. | 녹차 |
| 미산화차 | 10% 내외 | 살청이나 유념 과정 없이 실내외에서 찻잎을 서서히 시들리고 건조하면서 수분을 말리는 동안 미약하고 자연스러운 산화만을 유도한 차다[1]. 은은하고 달콤한 풍미를 지닌다. | 백차 |
| 부분산화차 | 10~70% | 위조와 주청을 거쳐 산화를 일정 부분 진행시킨 뒤, 특유의 향이 최고조에 달했을 때 살청하여 산화를 중단시킨 차다. 산화도에 따라 맛과 향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8]. | 청차(우롱차) |
| 완전산화차 | 85% 이상 | 찻잎의 화학 성분이 붉게 변할 때까지 효소 산화를 거의 끝까지 유도한 차다[10]. 떫은맛이 크게 줄어들고 부드럽고 묵직한 바디감, 짙은 붉은색의 찻물을 낸다[2]. | 홍차 |
(참고: 황차와 흑차는 효소적 산화 작용보다는 습열 상태에서 일어나는 '민황(悶黃)' 공정이나 주변 미생물이 개입하는 '후발효(後醱酵)' 공정을 핵심으로 삼는 차로, 위 분류 체계와는 구분된다[11],[4].)
산화가 성분 및 효능에 미치는 영향
편집
산화 과정은 찻잎의 화학적 조성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지만, 특정 차가 영양학적으로 무조건 우월해지는 것은 아니며 섭취할 수 있는 주요 성분의 형태가 바뀐다[12].
비산화차인 녹차에 온전히 보존된 카테킨류는 신체의 산화 스트레스를 억제하는 강력한 항산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9],[10]. 반면 산화차인 홍차는 가공 과정을 거치며 카테킨의 함유량은 크게 감소한다[9]. 하지만 그 대신 산화 과정에서 새롭게 생성된 테아플라빈과 테아루비긴이 카테킨을 대신하여 강력한 항산화 물질로 작용한다[10]. 이러한 고분자 폴리페놀 성분들은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 개선, 혈관 건강 보호 및 항염증 등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보고되어 있어, 차의 효능은 산화도에 관계없이 각각 고유의 건강상의 이점을 제공한다[9],[10].
차의 각성 효과를 내는 카페인의 경우, 찻잎 자체에 함유된 카페인의 총량은 산화 과정에 의해 크게 변하지 않는다[12]. 다만 산화 과정에서 찻잎 조직이 파괴되고 수분 용해도가 달라져 뜨거운 물에서 카페인이 더 빠르게 용출되는 경향이 있다[12]. 또한 홍차를 우릴 때는 일반적으로 녹차보다 더 높은 온도의 물과 긴 추출 시간을 사용하므로 한 잔의 차에 담기는 카페인 함량이 더 높아지는 경우가 많다[12]. 아울러 산화 과정에서 생성된 테아루비긴 등의 거대 분자 화합물은 섭취 시 카페인과 결합하는 성질도 있어, 산화차를 마실 때 체내에 미치는 자극의 양상이나 흡수 양상이 비산화차와 다르게 나타나기도 한다[12],[4].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Ho, C. T., Lin, J. K., & Shahidi, F., 'Tea and Tea Products: Chemistry and Health-Promoting Properties', CRC Press, 2008.
- Roberts, E. A. H., 'The Chemistry of Tea Manufacture', Journal of the Science of Food and Agriculture, 1958.
- 정동효, 《차의 화학과 기능》, 홍익재, 2001.
- 식품의약품안전처, 식품영양성분 데이터베이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