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다법
엄다법(淹茶法)은 다기(茶器)에 찻잎을 넣고 끓인 물을 부어 차의 성분을 우려내 마시는 전통적인 음다법(飮茶法)이다[1]. 당나라 시기에는 '암차(痷茶)' 혹은 '엄차(淹茶)'로 불렸으며, 명나라와 조선시대를 거치며 현대의 포다법(泡茶法) 또는 우림차법의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1].
어원과 역사적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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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다법의 '엄(淹)'은 '담그다', '적시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으며, 역사적으로는 '가릴 암(痷/庵)' 자를 써서 암다법(痷茶法)으로도 불렸다[2]. 이 다법에 대한 최초의 구체적인 기록은 당나라의 차성(茶聖) 육우(陸羽)가 저술한 《다경(茶經)》 <육지의(六之飲)>에서 찾아볼 수 있다[3].
"마시는 차에는 거친 차(粗茶), 흩어진 차(散茶), 가루 차(末茶), 떡차(餅茶)가 있다. 이를 자르고(斫), 볶고(熬), 불에 쬐고(煬), 절구질하여(舂) 병이나 항아리(瓶缶) 속에 저장한 뒤 끓는 물을 부어 우려내는 것을 암차(痷茶)라고 한다." (飲有粗、散、末、餅者,乃斫、乃熬、乃煬、乃舂,貯於瓶缶之中,以湯沃焉,謂之痷茶。)[3]
당나라 시기에는 솥에 물을 끓이며 찻가루와 소금을 넣어 달이는 전다법(煎茶法)이 왕실과 문인들 사이에서 가장 격조 높은 다법으로 여겨졌으나, 엄다법 또한 간편한 제법 덕분에 민간과 황실 일부에서 널리 행해졌다[3][4].
한국의 차 역사에서도 엄다법은 중요한 변곡점을 형성한다. 삼국시대와 고려시대에는 주로 떡차를 맷돌에 갈아 찻사발에 담고 찻솔로 저어 거품을 내는 점다법(點茶法)이 유행하였다[5]. 그러나 조선시대에 이르러 잎차(엽차) 문화가 주류로 자리 잡으면서, 다관에 찻잎을 넣고 끓는 물을 부어 우려내는 엄다법이 전면적으로 보급되었다. 이는 다도의 형식을 한층 정형화하고 일상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엄다법의 행다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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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다법은 차의 종류와 찻잎의 건조 상태에 따라 세부적인 조절이 필요하나, 기본적인 행다(行茶)의 흐름은 일정한 단계를 거친다. 엽차를 기준으로 한 전형적인 엄다법의 순서는 다음과 같다.

온호(溫壺)와 온배(溫盃)
차를 우리기 전, 끓인 물을 다관과 찻잔에 부어 기기를 따뜻하게 데우는 단계다. 온호를 통해 다관의 온도를 올려두면, 이후 뜨거운 물을 부었을 때 급격한 온도 저하를 막아 차 성분이 균일하게 우러나도록 돕는다. 데운 물은 숙우나 퇴수기에 버린다.
투차(投茶)
데워진 다관에 알맞은 투차량의 찻잎을 넣는다. 차의 종류와 음용하는 인원에 따라 양을 조절하며, 일반적으로 물 100ml당 2~3g의 찻잎이 기준이 된다.
주수(注水)와 침출(浸出)
찻잎의 특성에 맞게 식힌 온수를 다관에 주수한다. 녹차나 덖음차의 경우 약 7080℃의 온수가 적당하며, 홍차나 우롱차, 발효차는 90℃ 이상의 고온수를 사용한다. 물을 부은 후 다관의 뚜껑을 덮고 13분간 기다려 차의 성분이 물에 충분히 녹아나오도록 한다.
출탕(出湯)
우러난 차액을 출탕하여 찻잔에 나누어 담는다[4]. 이때 차의 농도가 잔마다 균일해지도록 숙우에 먼저 전량 따른 뒤 나누어 담거나, 여러 찻잔에 조금씩 번갈아 가며 따르는 방식을 취한다[4]. 다관 내부에 물이 남으면 차가 계속 우러나와 다음 탕수가 떫어지므로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남김없이 짜내는 것이 중요하다.
다른 전통 다법과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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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의 전통적인 음다 방식은 크게 자다법(煮茶法), 점다법(點茶法), 엄다법(淹茶法)의 세 가지로 분류된다[3]. 각 다법은 시대적 배경, 사용되는 차의 형태, 필요한 다구에 따라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
| 구분 | 자다법 (煮茶法) | 점다법 (點茶法) | 엄다법 (淹茶法) |
|---|---|---|---|
| 주요 유행 시기 | 당나라 및 그 이전[3] | 송나라, 고려시대[5] | 명나라, 조선시대~현대[1][5] |
| 차의 형태 | 떡차(병차), 거친 가루[3] | 미세한 찻가루(말차)[5] | 잎차(산차, 엽차), 고형차[1] |
| 제조 및 음용 방식 | 끓는 물에 차를 넣고 직접 삶거나 달임[3] | 잔에 가루를 넣고 물을 부어 조유 후 다선으로 거품을 냄[5] | 다관에 찻잎을 넣고 뜨거운 물을 부어 우려냄[1] |
| 핵심 다구 | 풍로, 복(솥), 가위, 집게, 숟가락[3][6] | 다완(찻사발), 다선(찻솔), 탕병[5] | 다관(주전자), 숙우(식힘그릇), 찻잔 |
| 미식적 지향점 | 차의 진한 농축미와 부재료의 조화[3][5] | 차 거품의 시각적 아름다움과 부드러운 질감[5] | 찻잎 본연의 맑은 색, 은은한 향과 여운[3] |
과학적 특징 및 효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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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다법은 찻잎을 직접 삶지 않고 온수로 침출하기 때문에, 찻잎에 함유된 고유의 미생물적·화학적 유효 성분을 가장 섬세하게 보존하여 추출할 수 있는 방식이다[7].
주요 성분의 온도별 용출 제어
찻잎에 함유된 주요 성분인 카테킨(Catechin), 에피갈로카테킨 갈레이트(Epigallocatechin Gallate, C22H18O11), 테아닌(Theanine), 카페인 등은 물의 온도에 따라 용출 속도가 달라진다. 떫은맛과 쓴맛을 내는 카테킨과 카페인은 80℃ 이상의 고온에서 빠르게 용출되는 반면, 감칠맛과 단맛을 내는 아미노산 계열의 테아닌은 낮은 온도에서도 비교적 잘 용출된다. 엄다법은 탕수의 온도를 미세하게 조절함으로써 특정 성분의 과도한 추출을 억제하고 맛의 균형을 잡을 수 있게 한다.
항산화 물질의 보존
차를 높은 온도에서 오랫동안 끓이는 자다법과 달리, 엄다법은 열에 취약한 비타민 C나 폴리페놀류 등의 열분해를 최소화한다. 특히 반발효차나 발효차를 엄다법으로 우려낼 때 생겨나는 황색의 테아플라빈(Theaflavin, C29H24O12)과 적갈색의 테아루비긴(Thearubigin) 등은 체내 유해 산소를 제거하는 항산화 작용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보고되어 있다.
건강적 효능
엄다법을 통해 적절히 우려낸 차는 만성 피로 해소와 정신적 긴장 완화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차에 포함된 테아닌 성분은 뇌의 알파파 발생을 증가시켜 불안감을 완화하고 인지 능력을 개선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며, 고온에서 찻잎을 장시간 달이지 않아 카페인의 자극적인 작용이 상대적으로 완만하게 발현되도록 돕는다. 또한, 적정 온도의 온수로 침출된 카테킨 성분은 혈중 콜레스테롤 수치 개선 및 혈행 흐름을 원활히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으로 학계에 보고되어 있다.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육우, 《다경(茶經)》, 760년경
- 정민, 《새로 쓰는 조선의 차 문화》, 김영사, 2011.
- 유양석, 《한국의 다도》, 김영사, 20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