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다완
조선다완(朝鮮茶碗)은 조선 시대에 한반도에서 제작되어 일본으로 전래된 말차용 찻사발이다[1]. 일본에서는 이를 주로 고려다완(高麗茶碗, 코라이 다완)이라 부르며, 중국에서 전래된 화려하고 완벽한 대칭의 가라모노 다완에 대응하여 투박하면서도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미감을 지녀 일본 와비차(侘び茶)의 중심적인 다구로 평가받는다[2][3].

관련 항목: 와비사비
어원과 개념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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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다도사에서의 위상과 와비차의 유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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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다도 문화는 12세기 말 남송에 유학한 승려 에이사이(栄西)가 말차 제법을 가지고 귀국하면서本格적으로 전개되었다[4]. 초기의 일본 다회는 최고 권력층의 신분 과시 수단이었으며, 중국에서 수입된 고가의 대칭적이고 화려한 천목다완이나 청자 등의 가라모노를 소장하고 감상하는 서원차(書院茶) 중심이었다[2][5].
그러나 무로마치 시대 말기에서 센고쿠 시대로 이행하는 과정 속에서, 형식적인 사치와 강박적인 좌우 대칭의 인공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무라타 주코(村田珠光), 다케노 조오(武野紹鷗)를 거쳐 센노 리큐(千利休)에 이르는 과정에서 소박함, 비대칭성, 미완성의 흔적 속에서 본질적인 미를 찾는 와비차가 정립되었다[4][5].
이 과정에서 조선의 민간 가마(민요)에서 일상적인 밥공기나 국그릇으로 쓰이던 사발들이 새롭게 발견되었다[1][3]. 장식이나 대칭에 얽매이지 않고 빠른 물레질로 무심히 빚어낸 조선 사발의 소박함은 와비차의 정신에 가장 완벽히 부합하는 기물로 인정받았다[1][3]. 센고쿠 시대 당시 명품 조선다완은 한 점이 성(城) 하나 혹은 영지와 맞바꿀 수 있을 정도의 막대한 위세품이자 가치를 지닌 권력의 상징물로 기능했다[2].
제작 배경에 따른 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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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다완은 제작된 목적과 역사적 배경에 따라 크게 생활 기물을 다구로 바꾼 전용(轉用) 다완과 처음부터 일본의 주문을 받아 제작된 전용(專用) 다완의 두 부류로 구분한다.
전용(轉用) 다완
조선 국내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민간 가마에서 일상적인 잡기, 즉 밥그릇이나 국그릇, 물대접 등으로 대량 생산된 생활 용기이다. 이를 사들인 일본 다인들이 말차를 개어 마시는 말차완으로서의 가치를 발견하고 다용도로 전환하여 사용하기 시작했다. 인위적인 다도의 법식을 의식하지 않은 채 도공들의 숙련된 손길에 의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졌기 때문에 생명력 넘치는 형태와 거친 질감이 돋보인다[1]. 이도다완, 미시마다완, 고모가이다완, 도토야다완 등이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전용(專用) 다완 (주문 제작 다완)
임진왜란 이후 조선과 일본의 외교 관계가 회복되면서, 일본 다도계의 선호도와 요구 사양이 고도로 구체화됨에 따라 일본에서 보낸 도안(서계)이나 견본을 바탕으로 조선의 가마에서 특별히 구워낸 다완이다[6][7]. 주로 대일 무역의 공식 창구였던 동래부 관할의 양산 법기리 요지나 부산의 두모포왜관 및 초량왜관 내에 설치되었던 부산왜관요(부산요)에서 제작되었다[6][7]. 이는 조선 도공의 뛰어난 기술력과 일본 다인의 미적 감각이 결합된 합작품으로서 독창적인 조형미를 띤다[6]. 대표적으로 고혼다완, 고쇼마루다완, 이라보다완 등이 있다[6].
조선다완의 주요 종류와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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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다완은 사용된 태토, 시유 기법, 장식, 가마터 등에 따라 세부 분류가 세분화된다.
이도다완(井戶茶碗)
조선다완 중에서 최고의 품격과 가치를 인정받는 찻사발이다. 현재 일본 교토의 대덕사(다이도쿠지) 고봉암(고호안)에 전해지는 '기자에몬 이도(喜左衛門 井戶)'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8]. 이도다완의 감상 기준은 다음과 같은 조형적 특징에 기반한다[9].
- 비파색(枇杷色) 표면: 전체적으로 옅은 살구색에서 황갈색에 이르는 부드럽고 따뜻한 색감을 띤다[9].
- 매화피(梅花皮, 카이라기): 유약이 녹을 때 태토와 유약의 수축률 차이나 가마의 온도 차이로 인해 굽 언저리에 몽글몽글하게 뭉쳐서 굳은 현상이다[9]. 마치 매화나무 고목의 거친 등걸이나 물방울이 맺힌 듯한 오돌토돌한 질감을 제공한다[9].
- 죽절(竹節)굽: 다완 밑부분의 굽이 대나무 마디처럼 힘차고 높게 깎여 있어 강인하고 안정감 있는 균형을 보여준다[9].
- 물레선과 물고임 자리: 측면에 자연스러운 물레 회전 흔적이 뚜렷이 남으며, 내부 바닥에는 말차 가루와 물을 다선으로 저을 때 유용하도록 동그랗게 파인 물고임 자리가 형성되어 있다[9].
미시마다완(三島茶碗)
조선 시대의 분청사기 기법을 고스란히 반영한 다완이다[10]. 회청색의 태토 표면에 국화 무늬의 도장을 촘촘히 찍거나 빗살 모양의 홈을 판 뒤, 백토로 상감하고 투명한 유약을 입혀 굽는다. 가늘고 정교한 무늬의 반복이 자아내는 차분하고 밀도 높은 장식성이 특징이다.
고모가이다완(熊川茶碗)
경상남도 웅천(현재의 창원시 진해구 웅천동) 일대의 가마에서 제작되어 수출된 백자 계열의 다완이다[1][5]. 웅천의 일본식 훈독인 '고모가이'에서 유래했다. 입구가 밖으로 단정하게 휘어 벌어지며 내부는 둥글고 깊어 말차를 안정적으로 격불하기에 적합한 조형을 이루고 있다.
도토야다완(斗斗屋/魚屋茶碗)
철분이 많아 불그스름한 태토에 아주 얇게 유약을 도포하여 옅은 노란색과 푸른 빛이 뒤섞여 나타나는 오묘한 표면이 특징이다[11]. 기벽이 비교적 얇고 물레 선이 조밀하게 서 있다. 센노 리큐가 생선가게(魚屋)에서 이 그릇을 발견하여 사용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11][12].
이라보다완(伊羅保茶碗)
모래알이 섞인 까슬까슬한 태토(사질토)를 사용하여 거친 표면 질감을 도드라지게 연출한 주문다완이다[11]. 철유를 불규칙하게 시유하여 표면이 황록색이나 회갈색을 띠며, 손에 닿을 때 거친 흙의 생명력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고쇼마루다완(御所丸茶碗)
일본의 유명 다인 후루타 오리베(古田織部)의 파격적인 미적 감각이 깊게 관여한 찻사발이다[13]. 전형적인 원형을 완전히 탈피하여 마치 신발이나 상자처럼 찌그러진 타원형태를 지니며, 굽 또한 사각이나 육각 등 다각형으로 날카롭게 깎아낸 무작위성과 비대칭성의 극치를 보여준다.
| 분류 명칭 | 기법 및 태토의 특징 | 주요 형태 및 도드라지는 미감 | 대표 유물 및 산지 예시 |
|---|---|---|---|
| 이도다완 | 비파색 유약, 수비 과정을 줄여 투박하고 거친 태토[12][14] | 죽절굽, 매화피(카이라기), 깊은 울안, 물고임 자리[9] | 기자에몬 이도 (일본 국보, 하동·웅천 가마 계열)[15] |
| 미시마다완 | 분청사기 인화문 및 상감 기법[10] | 표면에 국화문, 빗살문 등 반복적인 무늬 장식 | 고미시마 다완 (전라도, 경상도 분청사기 가마)[10] |
| 고모가이다완 | 백토 화장 및 투명 유약 시유, 비교적 단단한 경질 | 입구가 밖으로 벌어지는 전형적인 주발 형태 | 웅천 고모가이 다완 (창원 웅천 가마터)[15] |
| 도토야다완 | 철분이 많은 적갈색 사질토, 얇은 푸른빛 유약 | 물레선이 촘촘하고 얇은 두께, 조밀한 형태[11] | 센노 리큐 소장 옥도도야 다완 (양산 가마 계열)[11] |
| 이라보다완 | 모래알이 강하게 섞인 황회색 태토, 얇은 황록색 유약 | 굽 안팎의 거친 깎기 흔적, 까슬까슬한 표면 질감[11] | 황이라보, 구기보리 이라보 (양산 법기리 요지)[11] |
| 고쇼마루다완 | 백토 분장 및 철채 귀얄 기법 혼용, 다각형 깎기 | 비대칭으로 찌그러진 타원형 구연부, 사각·육각 굽 | 김해 주문 고쇼마루 다완 (김해 가마 계열) |
조형적 미감과 와비사비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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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다완이 지닌 조형적 미의 핵심은 무위자연(無爲自然)과 무심(無心)의 발현이다[16]. 조선의 사기장들은 인위적인 완벽성을 고집하지 않고, 흙의 원래 성질과 유약의 흐름, 불길의 변화를 거스르지 않는 무위의 상태에서 물레를 돌렸다[16].
그 결과 가마 안의 연기와 불길이 태토 내부의 철분과 부딪쳐 형성한 불규칙한 요변 얼룩, 기포가 빠져나가며 생긴 미세한 흔적, 고르지 않은 균열 등은 공예의 자연스러운 멋으로 수용되었다[1].
또한 빙열의 틈새로 오랜 시간 말차의 찻물이 배어들면서 다완의 색깔이 서서히 달라져 깊이를 더해가는 '하기의 일곱 변화(萩の七化)' 현상은 조선다완을 고정된 사물이 아닌 끊임없이 변화하는 유기적인 예술품으로 대우하는 근거가 되었다[17]. 이는 소박하고 낡은 것 안에서 내면의 충만함을 추구하는 와비사비(侘寂) 정신과 직접적으로 통한다[9][16].
한일 도자 문화교류사에서의 의의와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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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다완은 한반도의 도자 기술과 일본 다도계의 미학적 철학이 조우하여 형성된 독특한 문화사적 유산이다[6][18]. 16세기 말 임진왜란 당시 한반도에서 연행된 조선 도공들은 일본 아리타, 사쓰마, 하기 등지에 정착하여 일본 도자 산업의 지형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17][19]. 특히 이경·이작광 형제에 의해 개창된 하기야키(萩焼)는 조선다완의 흙 맛과 유약 성향, 조형 정신을 정통으로 계승하여 일본 내에서 독자적인 차 도구 영역을 확립했다[17].
조선 후기에는 부산요를 통해 양국의 외교 및 상업적 목적 하에 합작 도자기 생산 체제가 장기간 운영되며 문화적 소통을 매개하기도 했다[6][19]. 오늘날 한국의 전통 도예계에서도 유실되었던 조선다완의 고유한 흙, 유약 배합, 가마 소성 기법을 엄밀히 고증하고 고유한 무심의 미학을 원형대로 복원하려는 재현 연구와 예술적 시도가 활발히 지속되고 있다[20].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정양모, 《한국의 도자기》, 문예출판사, 1991.
- 야나기 무네요시, 신형식 역, 《조선과 그 예술》, 신구문화사, 1974.
- 신한균, 《우리 사발 이야기》, 가람기획,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