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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련

허백련(許百鍊, 1891~1977)은 호남 남종화(南宗畫)의 거장이자, 일제강점기와 광복 이후 단절 위기에 처했던 한국의 전통 차 문화를 무등산 자락에서 복원·중흥시킨 근현대 다도(茶道)의 선구자이다. 호는 의재(毅齋)이며, 1946년 광주 무등산 증심사(證心寺) 계곡의 차밭을 인수해 '삼애다원(三愛茶園)'을 조성하고 명차 '춘설차(春雪茶)'를 생산하여 보급함으로써 한국 현대 차 문화와 산업의 기틀을 마련하였다[1].

생애와 무등산 정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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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련은 전라남도 진도에서 태어나 한학과 서화를 익히며 성장하였다. 조선 말기 남종문인화의 거두였던 소치 허련(許鍊)의 방계 혈족으로서 가학(家學)을 이어받았으며, 일본 도쿄로 건너가 메이지대학교 법학과에서 수학하다가 회화로 전향하여 고무로 스이운(小室翠雲)에게 동양화를 사사했다. 귀국 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하며 두각을 나타냈고, 전통 화풍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남종산수화의 경지를 개척하였다[2].

광복 직후인 1946년, 허백련은 복잡한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광주 무등산 증심사 북쪽 계곡의 춘설헌(春雪軒)에 은거하였다[1][3]. 당시 무등산 기슭에는 통일신라와 고려 시대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던 증심사 승려들의 차밭이 일제강점기 일본인에 의해 잠시 기업형 차밭으로 관리되다가 방치된 채 황폐해져 있었다[1][3]. 허백련은 약 10만 m2(3만여 평)에 이르는 이 폐다원을 인수하여 정비에 나섰다[1][4][5]. 이는 단순한 화가의 낙향이 아니라, 민족 전통 예술의 근원인 차 문화를 부활시키고 피폐해진 농촌을 살리기 위한 실천적 결단이었다.

삼애사상과 다도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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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련의 차 문화 운동은 그의 독창적인 생활철학인 삼애사상(三愛思想)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삼애사상은 다음 세 가지 근본 원리로 구성된다.

  • 애천(愛天): 하늘을 공경하고 자연의 이치와 도리를 따르는 경천애인적 신념[1].
  • 애토(愛土): 흙과 국토를 사랑하며 농업을 국가의 근본으로 여기는 농본주의적 실천[1].
  • 애인(愛人): 인간을 존중하고 이웃과 민족을 사랑하며 서로 돕는 공동체 정신[1].

허백련 도식

허백련은 1946년 삼애학원(후일의 광주농업고등기술학교)을 설립하여 무상으로 농촌 청소년들에게 농업 기술과 민족정신을 교육하였다[1][6]. 그는 학생들과 함께 무등산 비탈의 차나무를 직접 가꾸었으며, 춘설차를 생산하여 판매한 수익금 전액을 학교 운영비와 학생들의 장학금으로 충당하였다[1][6]. 허백련에게 차는 단순한 기호음료가 아니라 농촌 경제를 일으키고 교육을 지속하게 하는 경제적 자립 기반이자 실천적 도구였다[6].

춘설차(春雪茶)의 제다와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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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애다원에서 생산된 차는 춘설차(春雪茶)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졌다[1]. '춘설'이라는 명칭은 중국 송나라 문인 나대경(羅大經)의 저작 『학림옥로』(鶴林玉露)에 수록된 시구인 "일구춘설승제호(一甌春雪勝醍醐, 한 사발의 춘설차가 제호보다 낫다)"에서 따왔다[1][2]. 여기서 제호(醍醐)는 불교에서 가장 뛰어난 맛이자 부처의 최상승 경지를 비유하는 표현으로, 춘설차의 맑고 고아한 품격을 상징한다[1].

재배 환경

무등산 해발 약 350~700m 기슭에 자리 잡은 삼애다원은 차나무 생육에 최적의 자연 조건을 갖추고 있다[2]. 일교차가 크고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어 직사광선을 완화해주며, 경사면의 배수가 원활하고 낙엽이 썩어 형성된 부엽토층이 풍부하다[1]. 허백련은 인공 농약이나 화학비료를 배제하고 자연 순응적 방식으로 차밭을 관리하였다[1][2].

제다 특성

허백련이 정립한 춘설차의 가공 방식은 전통 솥덖음 방식(부초차)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맑은 풍미를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구분 춘설 녹차 춘설 홍차
발효도 불발효차(0%) 완전발효차(80% 이상)
채엽 시기 4월 하순(곡우 전후) ~ 5월 초순(입하 무렵)[1] 5월 중하순 하급 엽 중심 채엽
가공 공정 덖음(살청) → 유념(비비기) → 건조 → 가향 위조(시들리기) → 유념 → 산화발효 → 건조
풍미 특성 맑고 푸른 수색, 은은한 밤 향, 산뜻하면서도 깊은 감칠맛[2][3] 진한 홍갈색 탕색, 부드러운 단맛과 과일 향
역사적 의의 무등산 야생 다맥을 계승한 한국 대표 수제 잎차[1][2] 한국 현대 홍차 제조의 초기 모델 제시[6]

춘설차는 잎차 형태뿐만 아니라 과거 장흥 등 남도 지역에서 제조되던 엽전 형태의 떡차인 청태전이나 미생물을 이용한 후발효차와 대비되는 현대적 덖음 녹차의 전형을 보여주었다. 증기를 이용한 일본식 증제차와 달리 무쇠솥에서 찻잎을 덖어내는 전통 방식을 고수하여 구수한 맛과 떫은맛의 절묘한 균형을 완성하였다[2].

차정신과 다도 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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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백련은 "차를 마시는 민족은 흥하고, 술을 숭상하는 민족은 망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 정국, 한국전쟁을 거치며 흐트러진 민족혼을 차를 통해 바로잡고자 하였다. 그는 "우리 민족이 차를 마심으로써 정신을 맑게 하고, 맑은 정신으로 매사를 올바르게 판단하여 실천해야 실수를 줄일 수 있다"고 역설하며 일상생활 속 차 마시기를 독려했다.

춘설헌은 당대 남도 문화와 예술, 사상의 중심지 역할을 하였다. 이곳에는 정·관계 요인을 비롯하여 예술가, 문인, 학자들이 끊임없이 방문하였다[6]. 허백련은 찾아오는 손님 누구에게나 춘설차를 손수 우려 대접하였으며, 차 한 통을 사러 오는 이에게 손수 그린 사군자나 산수화를 답례로 건네기도 하였다[3]. 프랑스 소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Constantin Virgil Gheorghiu) 신부가 춘설헌을 방문했을 때도 허백련은 차를 대접하며 동양적 무위자연과 차 정신을 전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한국 근현대 차문화사에서의 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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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초의선사(草衣禪師)와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 등이 꽃피웠던 남도 다맥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일반 대중 사이에서 거의 명맥이 끊겼다[7]. 해방 직후 한국 다도는 지리산 다솔사의 효당 최범술, 해남 대흥사의 응송 박양희, 부산의 금당 최규용, 그리고 무등산의 의재 허백련 등 소수의 선각자에 의해 유지되었다.

이 중 허백련은 차의 생산(삼애다원), 제조(춘설차), 인재 양성(농업학교), 차 문화 대중화(춘설헌 교유)를 단절 없이 하나로 묶어 실천한 독보적인 인물로 평가받는다[1][6]. 1980년대 이후 일어난 한국 현대 차 문화 부흥 운동의 배경에는 허백련이 무등산에서 지켜낸 찻잎과 다원 인프라가 결정적인 마중물 역할을 하였다. 춘설차는 광주광역시의 전통식품 및 지역특산품 제1호로 지정되어 그 역사적·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의재미술관과 직계 후손들을 통해 삼애다원의 차맥이 계승되고 있다[1][5][8].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한국학중앙연구원, '허백련(許百鍊)',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의재미술관, 《의재 허백련: 삶과 예술》, 심지, 2001.
  • 광주광역시, 《무등산 춘설차의 역사와 문화》, 광주향토문화연구소,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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