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청
증청(蒸靑)은 차를 만드는 제다법의 초기 단계인 살청(殺靑) 과정에서, 뜨거운 수증기를 이용해 찻잎의 산화효소를 불활성화하는 가공 방법을 가리킨다[1]. 이 공정을 거쳐 만들어진 녹차를 증청녹차(蒸靑綠茶) 또는 증제차(蒸製茶)라고 부른다[1].
역사적 유래와 변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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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청은 중국의 차 역사에서 가장 일찍 정립된 살청 방식 중 하나이다[2]. 위진시기의 쇄청(曬靑)에 이어 당나라 시기에 이르러 체계화되었으며, 육우가 저술한 《다경(茶經)》에 그 구체적인 공정이 기록되어 있다[3][4]. 당대의 제다 방식은 찻잎을 시들리기 전에 증기로 찌는 '증(蒸)' 단계를 거친 후, 이를 찧고(搗) 틀에 눌러 모양을 잡은(拍) 뒤 불에 말리는(焙) 형태로 떡차나 단차(團茶)를 제조하는 것이 표준이었다.
송나라 시대에는 증청 방식이 더욱 정교해져 용과 봉황의 문양을 찍은 고급 단차인 용단봉병(龍餠鳳餠) 등이 황실 조공품으로 성행하였다. 그러나 명나라 초인 1391년, 명 태조 주원장이 백성들의 노고를 덜기 위해 단차의 제조와 조공을 금지하고 잎차 형태인 산차(散茶)만을 진상하도록 어명을 내리면서 제다 환경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이때 가공이 편리하고 고소한 맛과 향을 내는 솥덖음 방식인 초청 제다법이 중국 녹차의 주류로 자리 잡았으며, 상대적으로 번거롭고 변질되기 쉬운 증청법은 점차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반면, 당·송 시기 중국으로부터 불교 문화와 함께 차 씨앗 및 제다 기술을 받아들인 일본은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17세기 에도 막부의 쇄국정책 기간을 거치며 일본은 증청법을 고유의 가공 방식으로 고도로 발전시켰다[5][6]. 오늘날 일본에서 생산되는 센차(전차)와 교쿠로(옥로) 등 녹차의 90% 이상이 증청 방식을 통해 제조되고 있다[5]. 한국 역시 전통적으로 찻잎을 시루에 찌는 증청을 활용하여 떡차를 만들었으나, 조선시대 이후에는 가마솥에 덖는 초청 방식이나 찌기와 덖기를 절충한 반증반초(半蒸半炒)의 형태가 널리 쓰였다[7].

제다학적 원리와 화학적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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찻잎을 수확한 후 그대로 방치하면 찻잎 내에 존재하는 폴리페놀 산화효소(Polyphenol Oxidase, PPO)의 활성으로 인해 카테킨 성분이 산화되어 갈변 현상이 발생한다[1]. 증청은 약 100°C에 달하는 고온의 열 수증기를 직접 분사함으로써 이 효소 단백질을 열 변성시켜 활성을 급격하게 차단한다[1][7]. 이를 통해 찻잎의 발효도를 0%에 가까운 비발효 상태로 고정한다[1].
엽록소의 보존
쇠솥에 찻잎을 직접 닿게 하여 높은 열을 전달하는 초청 방식과 달리, 증청은 수증기를 매개로 한 열 전달 방식이어서 열 분포가 균일하고 국소적인 과열(탄화 현상)이 발생하지 않는다[8][9]. 이로 인해 엽록소(클로로필) 분해와 열 변성이 최소화되어 완성된 찻잎은 물론, 우러난 탕색과 우리고 난 후의 잎인 엽저까지 생생한 녹색을 그대로 유지한다[10]. 차 감평학에서는 이를 '잎이 푸르고, 탕색이 푸르고, 엽저가 푸르다'고 하여 **삼록(三綠)**이라는 특성으로 규정한다[10].
카테킨 및 기타 성분 보존
증청 과정은 카테킨의 열 분해를 최소화하여 녹차 특유의 성분을 원형에 가깝게 보존한다. 특히 강력한 항산화 물질인 에피갈로카테킨 갈레이트(Epigallocatechin Gallate, EGCG)와 아미노산 성분인 테아닌이 비교적 온전히 유지된다. 그러나 수증기로 가열하는 특성상 수용성 성분의 일부가 수증기와 함께 손실될 우려가 있어, 정밀한 가열 시간 및 증기 압력 제어가 필수적이다.
증청의 공정상 분류와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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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청 제다법은 수증기를 쬐어주는 시간과 압력, 그리고 기술적 지향점에 따라 크게 여러 가지 방식으로 구분된다[5][6]. 현대 증청 기술이 가장 발달한 일본의 분류법이 대표적이다[5][6].
아사무시 (浅蒸し)
- 정의: 약하게(짧게) 찌는 방식이다[5][6].
- 시간: 통상적으로 약 20초에서 30초 동안 증기를 가한다[7].
- 특징: 찻잎의 원형이 바늘처럼 길고 곧게 잘 보존되며 조직의 손상이 적다[7][11]. 우러난 차의 탕색은 투명도가 높은 연한 황록색을 띤다[11]. 맛은 뫼글고 뫼운 맛이 다소 살아있어 신선하고 산뜻하며 깔끔한 청향(풀 향)이 도드라진다[11].
후카무시 (深蒸し)
- 정의: 깊게(길게) 찌는 방식이다[5][6].
- 시간: 약 40초에서 120초가량 증청 공정을 진행한다.
- 특징: 증기를 오래 쬐어 찻잎 조직이 부드러워지므로 가공 과정에서 쉽게 바스러져 완성된 찻잎 모양은 다소 조각나거나 불규칙하다[11]. 그러나 우렸을 때 찻잎 미세 입자가 탕 속에 섞여 나와 불투명하고 짙은 녹색을 띠게 된다[11][12]. 덖음 향이나 뫼운 맛은 현저히 줄어들고, 감칠맛과 단맛이 극대화되며 입안에서 묵직한 바디감을 준다[11].
추무시 (中蒸し)
국가별 증청차의 종류와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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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증청차
일본 녹차 제다의 근간은 증청이며, 찻잎의 재배 방식과 가공 디테일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세분화된다[5].
- 교쿠로(옥로, 玉露): 수확하기 약 20일 전부터 차나무에 차광막을 씌워 햇빛을 차단하는 차광재배를 거친 찻잎을 증청한다. 햇빛 차단으로 인해 떫은맛을 내는 카테킨 생성이 억제되고 감칠맛을 내는 테아닌 성분이 풍부해져, 진한 옥색 탕색과 독특한 해조류 향(김 향), 그리고 매우 짙은 단맛과 감칠맛을 낸다[12].
- 센차(전차, 煎茶): 햇빛을 그대로 받고 자란 노지 찻잎을 증청하여 만든다[5]. 일본 녹차 생산량의 약 80% 이상을 차지하며, 신선한 풋내와 균형 잡힌 뫼운 맛, 청량한 감칠맛이 특징이다[11].
- 말차(가루차, 抹茶): 차광재배한 찻잎을 증청한 후 비비는 유념 공정을 생략하고 그대로 건조하여 줄기와 잎맥을 제거한 편차(덴차)를 만든다[7]. 이를 맷돌로 미세하게 갈아 분말로 만든 뒤, 다완에 넣고 따뜻한 물을 부어 다선으로 격불하여 거품을 내 마신다[7].
중국의 증청차
중국은 명대 이후 초청 방식이 주류가 되었으나, 역사적 가치를 보존하고 특유의 향미를 전승하기 위해 전통적인 증청법을 고수하는 명차가 극소수 존재한다.
- 은시옥로(恩施玉露): 후베이성 은시현 일대에서 생산되는 중국의 유일무이한 전통 증청녹차이다[13]. 당·송대의 증청법 맥락을 고스란히 잇고 있으며, 완성된 찻잎이 소나무 바늘처럼 얇고 곧으며 빛깔이 짙은 녹두색을 띤다[13]. 삼록(三綠)의 특성이 뚜렷하고 청아하며 매끄러운 목넘김과 은은한 난꽃 향이 특징이다.
한국의 증청차
한국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찻잎을 솥이나 시루에 쪄서 절구에 찧어 만드는 떡차 문화가 융성하였다. 대표적으로 전남 장흥의 '돈차(청태전)'가 여기에 해당한다.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이나 초의선사에 의해 초청(덖음) 중심의 제다법이 확립되면서 주류에서 밀려났으나, 현대에 이르러 부드러운 맛과 진한 녹색 탕색을 선호하는 소비 트렌드에 맞춰 기계식 증청설비를 도입한 '증제녹차'나 찌기와 덖음을 절묘하게 결합해 가마솥 덖음 향과 증청의 맑은 맛을 동시에 구현하는 반증반초식 우전, 세작 등의 차가 지속적으로 생산되고 있다[1][7].
증청과 초청 제다법의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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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청과 초청은 녹차의 개성을 결정하는 가장 지배적인 제다 변수이다[8][9]. 두 방식은 열을 전달하는 매질의 차이에서 비롯하여 가공 기술, 완성품의 물리적 성질 및 관능적 특성에 이르기까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1][8].
| 비교 항목 | 증청 (蒸靑) | 초청 (炒靑) |
|---|---|---|
| 열전달 매체 | 고온의 수증기 (Steam)[1] | 달구어진 쇠솥 (Pan)[8][9] |
| 열전달 방식 | 간접적이고 균일한 침투식 가열[8][9] | 직접 접촉에 의한 대류 및 전도식 가열[8][9] |
| 엽록소 보존 | 극대화 (엽록소 구조 파괴 최소화)[12] | 열에 의해 일부 황색계열(페오피틴)로 전환[10] |
| 외형 특징 | 곧고 날카로운 침상형(바늘 모양)이 많음[7][13] | 둥글게 말리거나 납작하게 눌린 곡선형이 많음 |
| 탕색 및 엽저 | 맑고 생생한 연록색 내지 탁한 짙은 녹색[10][12] | 황록색, 연한 황색 내지 맑은 황금색[10] |
| 주요 향미 | 청량한 풀 향(청향), 해조류 향, 부드럽고 담백함[7] | 고소한 가마솥 향(덖음 향), 구수한 단맛, 뫼운 맛의 잔향[7] |
| 대표 품종 | 일본 센차·교쿠로, 중국 은시옥로 | 중국 서호용정·벽라춘, 한국 전통 덖음차[7] |
현대 제다 산업에서의 기술적 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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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자동화 제다 공장에서 증청 공정은 정밀한 기계적 제어를 통해 균일한 품질의 차를 대량 생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수증기의 온도, 유입 속도, 회전 원통형 증청기 내에서의 차엽 체류 시간 등을 마이크로프로세서로 실시간 모니터링하여 살청 실패로 인한 붉은 반점(홍변 현상)이나 과도한 열 손상을 원천 방지한다. 최근에는 증청 후 고온 건조가 아닌, 적외선 조사나 마이크로웨이브를 결합하여 찻잎 내 수분을 제거하면서 살청을 동시에 만족하는 하이브리드 제다 설비 연구로도 이어지고 있어, 전통적인 증청법은 첨단 식품공학 기술과 융합하여 진화하는 추세이다.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육우, 《다경(茶經)》, 760년경
- 정동효, 노완섭, 허병송, 《차생활문화대전》, 홍익재, 2012.
- 조기정, '제다법에 따른 녹차의 화학성분 변화', 한국차학회지, 20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