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퇴
악퇴(渥堆)는 찻잎을 두텁게 쌓은 후 물을 뿌리고 덮어두어 고온다습한 환경을 유도함으로써 미생물에 의한 후발효를 촉진시키는 제다 공법이다[1][2]. 주로 흑차(黑茶)류, 특히 보이숙차(普洱熟茶)의 제조 과정에서 쓰고 떫은맛을 줄이고 부드러운 풍미를 형성하기 위한 핵심적인 공정으로 사용된다[2].
일반적으로 녹차와 같은 불발효차나 우롱차와 같은 반발효차가 찻잎 자체의 효소 산화나 물리적 공정인 포유 등을 통해 풍미를 형성하는 것과 달리, 악퇴는 외부 미생물의 작용을 극대화한다는 점에서 차별화된다[3][4]. 전통적으로 수십 년이 걸리던 보이차의 자연 숙성 과정을 단 수십 일 만에 완료할 수 있도록 고안된 인공 발효 기술의 정수이다[1][5].
1. 어원 및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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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퇴라는 명칭은 물을 뿌려 적신다는 뜻의 '악(渥)'과 찻잎을 무덤처럼 쌓아둔다는 뜻의 '퇴(堆)'가 결합한 한자어다[2][6]. 이는 수분을 머금은 찻잎을 퇴적하여 발효를 촉진하는 물리적 형태를 그대로 반영한다[2].
역사적으로 악퇴의 원초적 형태는 당·송 대 이후 차마고도를 통한 교역 과정에서 발견되었다[6]. 먼 길을 이동하던 찻잎이 비바람과 다습한 기후에 노출되며 자연적으로 미생물 후발효가 일어났고, 이를 통해 독특한 흑차가 만들어졌다[6].
현대적인 속성 악퇴 기술은 1970년대 초에 정립되었다[7]. 당시 중국 윈난성의 쿤밍차창(昆明茶廠)과 맹해차창(勐海茶廠)의 연구자들은 오랜 숙성 시간을 단축하고 즉시 음용이 가능한 차를 생산하기 위해 공동 연구를 시작했다[8]. 이들은 광동성 지역의 다습한 차 보관 환경과 전통 흑차 제조법을 체계화하여, 1973~1974년경에 온습도를 인위적으로 조절하는 '조수악퇴(潮水渥堆)' 공법을 성공적으로 발명하였다. 이어 1975년부터 이를 활용한 보이숙차가 대량 생산되며 현대 보이차 시장의 대중화가 시작되었다[8].
2. 악퇴의 원리 및 공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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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퇴는 정밀한 수분 공급, 온도 제어, 그리고 산소 공급을 위한 뒤집기 과정이 유기적으로 연결된 정교한 공정이다[2][7].
2.1. 원료 확보 (쇄청모차)
보이숙차를 제조하기 위해서는 먼저 윈난 대엽종 찻잎을 채엽하여 살청, 유념을 거친 뒤 햇볕에 말린 '쇄청모차(曬青毛茶)'를 확보해야 한다[9][10]. 일반적인 흑차가 유념 직후 건조하지 않은 상태에서 바로 악퇴에 들어가는 것과 달리, 보이숙차는 1차 건조가 완료된 쇄청모차를 기본 원료로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2.2. 조수(潮水) 및 퇴적(堆積)
건조된 쇄청모차에 약 3040℃ 전후의 깨끗한 물을 골고루 뿌려주는 조수 과정을 거친다[2]. 이때 찻잎의 함수율은 약 2030% 정도로 조정된다[2]. 수분을 머금은 찻잎은 약 1m 내외의 높이로 두텁게 쌓아 올리는데, 한 번에 발효를 진행하는 양은 대형 차창의 경우 수 톤에서 수십 톤에 이른다[8][10].
2.3. 복개(覆蓋)와 온도 유지
퇴적된 차 더미의 수분 증발을 막고 미생물의 번식에 알맞은 고온다습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두꺼운 마포나 천 등을 덮어둔다[2]. 이 시기 미생물의 활발한 대사 활동으로 호흡열이 방출되면서 차 더미 내부 온도가 서서히 상승하여 중후반기에는 최고 50~60℃에 달하게 된다.
2.4. 뒤집기 (번퇴, 飜堆)
차 더미의 내부 온도가 60℃를 초과하거나 산소가 차단되면 미생물 생태계가 파괴되어 찻잎이 부패하거나 원하지 않는 유해균이 번식할 수 있다. 따라서 발효 균일성을 확보하고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약 일주일에서 열흘 간격으로 차 더미를 헤쳐 섞어주는 뒤집기(번퇴) 작업을 진행한다[2]. 이 작업은 약 4060일의 전체 발효 기간 동안 평균 58회 반복된다.
2.5. 건조 및 분급
목표로 한 발효도(통상 70~80% 수준)에 도달하면 차 더미를 얇게 펴서 자연 건조하거나 저온 열풍 건조하여 발효 진행을 정지시킨다[11]. 건조가 완료된 차는 찻잎의 크기와 상태에 따라 등급을 나누는 분급 작업을 거치며, 이후 산차(散茶) 형태로 유통되거나 증기를 쐬어 긴압한 단차 형태로 가공된다[7][10].
3. 미생물의 역할과 화학적 성분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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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퇴 공정 중 일어나는 변화는 미생물이 분비하는 각종 대사 효소와 찻잎 내재 성분 간의 생화학적 융합 반응에 기인한다[10].
3.1. 관여 미생물 군집
악퇴 발효에는 호기성 곰팡이, 효모, 세균 등 다양한 미생물이 관여하며 시간 경과에 따라 우점종의 교체가 발생한다.
- 곰팡이류: 발효 초기와 중기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것은 아스페르질루스 루추엔시스(Aspergillus luchuensis)와 아스페르질루스 니가(Aspergillus niger) 등 검은누룩곰팡이 계열이다[4]. 이들은 섬유질과 전분을 가용성 성분으로 분해하는 다양한 효소를 분비한다[12].
- 효모류: 수분과 적정 온도가 유지되는 환경에서 번식하며, 당류를 유기산과 에스테르 성분으로 변환시켜 차에 은은한 단향과 과일향을 부여한다.
- 세균 및 젖산균: 발효 후기에 미량 작용하여 차의 산도를 부드럽게 조절하고 깊은 감칠맛을 형성하는 데 기여한다.
3.2. 주요 성분의 화학적 변화
악퇴를 거치며 찻잎의 맛, 향기, 탕색을 결정하는 화학적 구조가 극적으로 재편된다.
| 성분 | 악퇴 이전 (쇄청모차) | 악퇴 이후 (보이숙차) | 변화 메커니즘 및 품질에 미치는 영향 |
|---|---|---|---|
| 카테킨 (Polyphenol) | 매우 높음 (강한 쓰고 떫은맛) | 대폭 감소 | 미생물 분비 효소 및 열 작용에 의해 에피갈로카테킨갈레이트 등의 간단 카테킨이 중합 및 산화됨. 이로 인해 쓰고 떫은맛이 사라지고 부드러운 맛으로 변화함. |
| 차갈소 (Theabrownins) | 극미량 | 다량 생성 (핵심 색소) | 카테킨이 산화되어 데아플라빈과 테아루비긴을 거쳐 최종 산화물인 차갈소로 중합됨. 보이숙차 특유의 검붉고 진한 탕색을 결정함[13]. |
| 갈산 (Gallic acid) | 낮음 | 급격히 증가 | 카테킨 분자 내의 에스테르 결합이 타나아제(Tannase) 등의 효소에 의해 분해되면서 갈산이 유리되어 나오며, 차의 감칠맛을 높임[14]. |
| 수용성 다당류 | 보통 | 유의미하게 증가 | 미생물이 방출한 셀룰라아제, 펙티나아제 등의 효소가 찻잎 세포벽의 섬유질을 수용성 당류로 분해하여 차의 묵직한 바디감과 단맛을 형성함. |
4. 특징 및 품질 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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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으로 악퇴 과정을 마친 보이숙차는 인위적인 화학 첨가물 없이도 오랜 세월 숙성된 차와 유사한 감각적 가치를 지닌다.
- 숙미(熟味)와 진향(陳香): 생산 직후의 보이숙차에서는 발효 과정에서 형성된 특유의 흙내나 지푸라기 냄새인 '악퇴미(渥堆味, 또는 숙미·숙향)'가 난다[15]. 이 냄새는 보관 및 건조 과정을 거치며 3~5년에 걸쳐 서서히 휘발되며, 이후 맑고 깊은 진향, 목재향, 대추향 등으로 안착된다[15].
- 자극성의 완화: 위 점막을 자극하는 강한 카테킨 성분이 대부분 산화 차갈소로 전환되었기 때문에 공복에 음용해도 속 쓰림이 덜하고 목넘김이 매우 부드럽고 매끄러운 특징(滑)을 보인다[9].
- 생리활성 기능: 악퇴 과정에서 다량 발생한 갈산과 차갈소, 수용성 다당류 등의 복합 작용으로 체내 지질 대사 개선, 소화 촉진, 혈중 콜레스테롤 저하 및 항산화 효과 등에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14].
5. 일반 흑차와 보이숙차의 악퇴 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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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6대 다류 중 흑차류는 대개 미생물을 이용한 후발효 과정을 거치지만, 산지와 품종에 따라 구체적인 악퇴 방식에서 차이를 나타낸다[2].
| 비교 항목 | 보이숙차 (윈난) | 호남흑차 (복전차 등) | 광서 육보차 |
|---|---|---|---|
| 기초 원료 | 윈난 대엽종 쇄청모차[9] | 중·소엽종 생엽[9] | 대엽종 및 중엽종 쇄청모차 |
| 원료의 상태 | 완전히 건조된 모차에 물을 뿌려 진행(조수) | 살청·유념 후 건조를 거치지 않은 젖은 상태에서 진행 | 건조 모차에 물을 뿌리거나 찐 뒤 악퇴 진행 |
| 주요 관여 미생물 | 아스페르질루스 루추엔시스, 효모 등[4] | 관돌산낭균(금화균, Eurotium cristatum)[12] | 아스페르질루스 계열 균종 및 세균 |
| 외형 특징 | 흑갈색을 띠며 주로 병차, 전차 등으로 압착됨[16] | 벽돌 모양으로 강하게 긴압되어 내부에 금빛 균사(금화)가 피어남[12] | 대나무 바구니(광쿠리)에 담아 장기 숙성함 |
현대의 악퇴 공법은 위생관리가 결여된 과거의 불법적인 '습창(濕倉)' 보관법 등과 명확히 구분되며, 밀폐도와 온습도가 엄격히 제어되는 현대적 시설에서 안전하게 이루어지는 제다 과학의 일종이다.
같이 보기
각주
참고 문헌
- 중국농업과학원 차엽연구소, 《중국다경(中國茶經)》, 상해문화출판사, 1992.
- 정동효 외, 《차 생활 문화 대사전》, 홍익재, 2012.
- Chen, An-Ying, et al., 'Microbial community succession and its relation to flavor compounds during the wet-piling process of Pu-erh tea', Food Chemistry, 2020.



